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강해(7)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17).

비전의 사람 2022. 5. 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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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올바른 사랑이 있고 잘못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사랑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을 더 이상 사랑하지 말라.”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이스 크림이나 커피 같은 것을 즐기지 마라는 것인가요? 아니면 공원에 가서 산책하고 쉼을 갖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집을 팔고 직장을 그만두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우리는 이 세상과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ㄹ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헬라어로 코스모스 라고 하는 세상은 신약 성경에서 세 가지의 의미를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의미했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세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넓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라고 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이라고 할 때에 사람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라고 할 때에 세상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언급한 세상은 지구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언급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의 유혹을 주는 근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이라는 말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언급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탄의 영향력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르침과 문화, 죄악된 활동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누룩과 같은 죄악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영적인 가치보다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물질주의, 그리고 경건을 벗어나 살아가는 쾌락주의 등과 같습니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이 세상의 왕”(요 14:30)이라고 부르셨고, 사도 바울은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8절에서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자를 이 세상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 이 세대의 아들(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 주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는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생태계에서 서로 영향력을 끼치며 생존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는 피조물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존재합니다. 이와같이 이 시대에 잘 나가는 기업들의 특징도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해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애플은 노트북과 데스크탑 컴퓨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만들어 소통하게 합니다. 그리고 애플에서 애플 페이로 물건을 구매하게 하고, 아이튠으로 원하는 컨텐트를 올려서 서로 공유하게 합니다. 그리고 애플은 장차 전기차를 만들려고 합니다. 즉 애플이라는 회사가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테슬라라는 거대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테슬라는 전기차를 만들지만, 그 배경에는 도지라는 슈퍼 인공지능 컴퓨터가 있어서 자율 주행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인공위성 4만개를 뛰워서 전 세계의 인터넷을 연결하는 스타링크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페이스 X 는 우주선을 개발하여 화성 여행을 꿈꾸고 있고, 미래에는 우주를 통과해서 세계 여행을 하는 것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회사도 운영하면서 전기차 충전 및 태양광 설치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보링 회사는 지하에 터널을 만들어 서울에서 부산 까지 단기간에 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테슬라 라는 거대한 회사를 통하여 생태계를 구축하여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한 자신의 생태계를 만들어 그의 자녀들을 통하여 다스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는 비성경적인 철학과 문화, 미디어, 성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 인본주의 가르침, 정치와 경제 등을 통하여 자신의 본성인 교만과 죄악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탄의 생태계에 갇힌 자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 방황하며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옳다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을 주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은 젠더 불평등이라고 하면 가디언 1 가디언 2 라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 까지도 젠더 불평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섭리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지칭할 때에 사용하며 배우는 단어입니다. 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가페적인 사랑 대신에, 이 세상을 향하여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강한 명령형으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의 성도들이 세상적인 시스템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경고를 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사고나 행동들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세상과 친구를 맺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하면 우리의 생각이 세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의 교제와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늘 세상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하는 것이 항상 세상적이라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는 것도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기꺼히 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소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의 것으로 교만하고 자신을 높이려 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물질이나 권세를 더욱 추구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세상이 주는 세 가지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

사도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저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경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의 시스템에 대하여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정욕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의 욕구를 의미합니다. 육신은 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육신은 우리의 삶에서 죄를 짓게 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느낌에 의하여 지배되는 삶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음식에 대한 탐심,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 영적인 가치를 버리고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려고 하는 강한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삶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으며 살아갑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삶은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충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육체의 소욕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에 대하여 갈라디아서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적인 죄를 먼저 지적합니다. 그것은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음행은 간통과 음행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간통은 결혼의 관계에 있는 배우자 외의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행은 불법적인 성적인 행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은 성적인 부도덕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호색은 성적인 죄에 깊이 빠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성적인 것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상 숭배와 관계된 죄입니다. 성경은 우상 숭배와 술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수는 무당 등과 같은 무속인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무속의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맺는 불의에 대한 것입니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그리고 투기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육체의 소욕입니다. 원수를 맺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극도로 증오하는 모습입니다. 분쟁은 다투는 모습입니다.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시비가 붙어 다투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다투며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육신의 정욕에서 온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질투하는 것입니다. 분냄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분노하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경쟁하려는 태도입니다. 분리함은 공동체 안에서 화합하지 않고 분리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단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이단들은 육체의 정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투기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술취함과 방탕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술에 취해서 살아가는 육신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은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모습은 이러한 태도와 가치가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음행이나 다툼이나 분리하는 것과 같은 모든 것들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서 성령이 주시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우리의 삶에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안목의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요일 2:16). 안목의 정욕은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소욕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눈은 유혹을 받게 하는 길이기도 하고, 인식하게 하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유혹을 받아 간통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맺어 처녀를 향하여 음욕을 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욥은 눈이 유혹을 받는 통로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눈과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라고 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기에 눈이 온전하면 몸이 밝지만,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눈이 나쁜 것을 바라보면 온 몸이 어두움의 죄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평안을 누리기도 하지만, 어두움에 의하여 죄의 길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물질주의의 유혹에 빠지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좋은 차나 옷들, 좋은 집, 건물 등의 유혹에 빠져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차나 옷, 집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비정상적인 욕구, 즉 탐욕을 품으면 자신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욱 사랑하는 것은 안목의 정욕에 빠지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이생의 자랑은 "pride of life(인생의 교만)" 입니다. 이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거만한 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 대하여 인정받고, 박수 받고, 지위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입니다. 헬라어로 교만이라는 단어는 가식적인 허풍을 떠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은행에는 100원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자신의 은행에 1억이 있다고 허풍을 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그는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24평이 있다고 하면, 자신은 28평의 집에서 산다고 자랑합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생의 자랑 또는 인생의 교만은 육체를 자랑하며, 방종하는 삶, 자만심 또는 허영심, 육체적인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삶, 거만한 모습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교만은 거짓된 우월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면 인생의 교만의 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했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먹음직도 한 것은 육체의 정욕이며, 보암직도 한 것은 안목의 정욕이며, 지혜롭게 할 만큼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의 과실을 먹어 죄를 범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이 세 가지로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돌 덩이를 떡이 되게 한 것은 육체의 정욕에 대한 것이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은 안목의 정욕이며, 높은 산에 세워 세상의 영광을 보여 준 것은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주는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인생의 교만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며, 그 결과는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 가지의 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과 육신, 그리고 마귀입니다. 이들의 권세는 우리의 힘으로는 이기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육신, 마귀를 이길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의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한 것에 대하여 세상은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간통이 죄라고 하셨지만, 이 세상은 사랑이라고 포장합니다. 하나님은 낙태가 죄라고 하셨지만, 이 세상은 자기 선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동성애가 죄라고 하셨지만, 이 세상은 자기 선택이라고 하면서 합리화하고 도리어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것은 단지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을 술을 마시지 않고, 욕하지 않고, 춤추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적인 술이나, 욕하지 않고,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을 거룩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이러한 외적인 죄들을 행하지 않으니까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규칙을 따르기 전에, 자신의 마음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교만에서 시작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아도 교만이 있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골방에서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빠져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정욕을 이기는 비결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은 우리를 반대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세상에서는 인기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음을 이해하며 그 분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것을 사랑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미워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 목사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목사님, 제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제 세상을 포기해야 할까요?” 그러나 무디 목사님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선생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믿음으로 살고 좋은 간증을 남기면, 세상이 당신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세상이나 그 정욕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 당시에 극장의 모습에서 온 단어입니다. 공연의 한 단원이 마치면 커튼이 내려오고 무대의 소품들은 무대에서 옮겨집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을 위해서 새로운 소품들을 무대에 갖다 둡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연극의 소품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시스템은 연극의 한 장면과 같습니다. 한 장면이 마치면 커튼이 내려지고 소품을 치웁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의 제도나 시스템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거나 성취한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커튼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마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연극이 끝난 후에 배우가 소품들을 찾으며 차나 가구, 그리고 식탁 등을 찾으며 자신의 것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따진다면 무척이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소품들은 연극을 위한 소품이지 배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찾으신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두고 가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요? 우리는 세상의 시스템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주님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비결은 마음에 하나님을 우선 순위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995년 어느날 38살의 한 남자가 일용직을 하는 직장을 가기 위해서 시카고의 8차선 도로를 불법으로 건너고 있습니다. 그는 4차선을 겨우 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바람이 불어 그의 모자가 날라가 도로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모자를 줍기 위하여 다시 도로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큰 트럭이 그 사람을 치자 그 사람은 즉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모자를 바꾼 것입니다. 가치없는 모자를 쫓아가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의 예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따르다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의미와 가치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의미나 목적,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인생의 참된 의미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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