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베드로전서 강해(8) -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 (벧전 4장)

비전의 사람 2016. 5. 28. 17:23

베드로전서 강해(8) -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 (벧전 4)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2).

 

삶의 변화는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눈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치라고 부릅니다. 기업이나 개인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과 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 가치의 그릇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정욕이 가득한 그릇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육체안에 거하기에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신앙인도 자신이 육체의 정욕에게 지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크게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7:23-24).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도 평생 자신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살았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가요?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5:24)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정욕이 가득한 그릇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서는 우리에게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이방인 즉 세상의 뜻을 따랐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3). 구원받지 않는 이 세상의 뜻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음란과 육체의 정욕을 위하여 술취하고 방탕한 삶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세상적인 춤과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추구하면 세상과 무척 가까울 것이며, 세상의 많은 친구들이 우리와 마음을 합하며 친구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음란한 삶을 살게 되면 음란한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정욕적이고 술과 방탕한 삶을 추구하면 세상에서 정욕적이고 술과 방탕을 추구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고 변화되어 새 생명의 삶을 살게 되면서 우리가 추구했던 이방인의 삶에서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세상은 우리가 그러한 극한 방탕으로 달려가지 않는 모습을 이상히 여기면서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탄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벧전 4:4-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그 분에게 직접 고하며 자신의 삶에 대하여 판단받을 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거쳐가야 할 미래의 사건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형벌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에 대하여 주님의 영광앞에 서서 영원한 상급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천국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4:6).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은 육신은 죄로 인하여 이 땅에서 사망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영생을 얻어 하나님처럼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첫째, 우리는 깨어나 기도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4:7).

 

육체의 정욕을 이길 능력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단의 권세 아래 거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는 통로이기에,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공급받아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한 젊은 등산가가 몽블랑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는 정상에 깃발을 꽂고 하산하던 중 베이스캠프에 들르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정상정복을 기념하는 축하파티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영웅심에 취해 긴장의 끈을 늦추었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몸에 감긴 구명로프가 귀찮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감긴 로프를 모두 벗어던졌습니다. 가이드는 무모한 행위를 거듭 지적합니다. “로프없이 하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 등산가는 교만과 방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산을 올라갈 때도 아무 일이 없지 않았는가. 내려가는 길은 훨씬 쉽고 안전하다.” 그 등산가는 빙벽을 타고 내려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아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이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긴장의 끈을 늦추면 절벽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기도는 인생의 구명로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자신의 영혼이 병들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이며, 힘들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지켜주는 로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고 권면합니다. , 우리에게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유혹과 세상의 시련이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더욱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영적 공급을 받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셨는데 이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됨을 증명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험한 풍파를 이기는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공동체가 견고하게 세워지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열심히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이기에 우리는 힘써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베드로전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허물이 있기에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덕이요 형제의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0:12) 고 했습니다. 공동체 가운데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를 향한 나쁜 감정으로 서로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곳에는 허물을 가리워주면서 관용과 포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공동체는 자신이 손해를 입고 심지어는 상처를 입어도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함으로 다른 지체들을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삶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을 이런 이야기로 표현하였습니다. 광활한 평지가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 그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힘을 다하여 도망을 갔습니다. 한참 도망가다 보니 큰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웅덩이 밑으로는 나무 덩굴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그 덩굴을 잡고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웅덩이 중간 쯤 내려가다가 밑을 보니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중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나운 짐승은 가지 않습니다. 그는 그 웅덩이 벽을 보았습니다. 돌 사이에 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꿀을 찍어 먹었습니다. 달콤하였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아래에 있는 독사도 위에 있는 사나운 짐승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위를 바라보니 하얀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타나 덩굴을 갈가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의 말대로 삶의 무거운 짐에 짓눌리어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든 상황에서도 꿀과 같은 것이 있기에 살맛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맛나게 만드는 꿀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톨스토이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그의 단편집을 보면 계속 인생을 살만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을 하면은 살맛이 납니다. 사랑은 힘을 주고, 사랑은 용기와 희망과 삶의 활력을 줍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셋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 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이렇게 사랑할 때에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더욱 활력있고 치유와 행복이 가득한 곳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것입니다.

 

데이브 백랙번이라는 목사님은 미국의 인디아나 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강도가 침입하여 아만다라고 라는 임신한 목사의 부인을 총으로 쏘아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수많은 교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데이브 목사는 매일 일어날 때마다 용서하기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쓴뿌리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자신에게 암적인 요인이 되어 자신을 파괴할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선택임을 매일 깨닫는 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강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생명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은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으로 살아갈 때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 가득하게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서로 원망없이 대접해야 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벧전 4:9).

 

성경은 우리가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은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숙박 시설이나 식당이 희박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큰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나그네에게 숙소나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베푸는 실천사항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이나 고향에서 추방당하여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자들에게 대접을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거처가 필요할 때에는 그들을 귀하게 여기면서 손대접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에 선교가 시작될 당시에 선교사님들이 시골이나 어촌으로 전도 집회를 가시게 되면 그곳에 있는 성도님들이 집을 오픈하여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면서 기쁨으로 섬기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섬기는 성도와 섬김을 받으시는 선교사님과 같은 주님의 종에게 함께 임함으로 큰 부흥의 씨앗이 되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주의 사자들을 대접하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셋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초청하게 됩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으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18:3-5). 아브라함과 사래가 그들을 위하여 극진히 음식을 준비하여 섬기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18:10). 아브라함이 접대한 자들은 천사들이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며 롯을 그 멸망 중에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손 대접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1-2). 우리가 섬기는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힘써 서로를 대접하여 특히 손님을 대접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는 선교사님들이나 강사 목사님들이 오셨을 때에 초청하여 섬겨주시는 성도님들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특별히 섬겨 주심으로 저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더욱 존중 받는 느낌을 받으시기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섬김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큰빛 교회에서 전국 친교회를 참석하게 되면, 그 교회에서는 성도님들이 34일간 목사님들을 위하여 집을 비워가면서 섬겨주시던 가정들이 있었습니다. 본인들은 부모님의 집으로 잠시 옮기고, 자신들의 집에서 목사님들이 편히 쉬시도록 숙소를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에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서로를 섬겨주는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목장 사역을 통해서 서로를 섬기는 삶을 실천할 수 있으며, 교회에 새로 방문한 성도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와 차를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서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선한 청지기같이 사역에 동참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는 청지기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재능을 주셨고,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성령이 내주하심과 더불어 영적인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은사를 가지고 자신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청지기의 의미는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이라는 뜻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사용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섬기게 될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 섬기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집을 세워가듯이 성도를 함께 세워가는 사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 사역과 목장 사역을 통해서 목표하는 것은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들을 서로 돌아보며 서로를 향하여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서로 봉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봉사는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교회의 다양한 사역에서 자신의 은사대로 믿음을 표현하고 교회의 사역을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없다면 찬양대가 없고 반주자가 없을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없다면 교회의 집사님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봉사하는 자가 없다면 교회의 목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각자의 위치에서 섬기는 삶을 살아가며,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봉사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믿음의 자세를 베드로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1).

 

청지기의 자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서로를 말로써 가르치거나 위로와 권면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서로를 향하여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대화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대화를 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간의 논쟁이나 비방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지혜로운 권면이 한 영혼을 절망이나 시련에서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사역에 사역에 동참하거나 서로를 향하여 봉사하게 될 때에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섬김과 구제, 가르치며 은사로 섬기는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과 재능, 그리고 재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됨으로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재능으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세이며 서로에게도 큰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벧전 4:19).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핍박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순교자의 목소리라는 단체는 페북을 통해서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핍박의 이야기들을 알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시리아의 교회가 불탄 가운데 그 가운데서 기도하는 몇 명의 성도들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극단적 이슬람들이 교회를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불탄 후에 그 교회안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단주마(Danjuma)라는 나이지리아 소년의 핍박을 소개했습니다 2015년 어느날 이슬람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이때 단주마라는 소년은 그의 왼쪽 머리가 잘리고,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그 결과고 그는 장님이 되었고 왼쪽 눈도 빛을 볼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다니는 아픔을 견뎌야 하고, 맹인학교에 다니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는 시력을 위해서 수술을 계획하고 있다고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견디며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때 성경은 우리를 시련하려고 찾아오는 불시험을 잘 견디고 오히려 주님이 주실 영광을 생각하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의 시련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핍박을 하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때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7-18).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이 심판의 시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먼저 다루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신다면,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은 무척이나 심각한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된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와 경건치 못한 죄인들이 받을 심판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살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그 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