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9) - 겸손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라
베드로전서 강해(9) - 겸손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라 (벧전 4:5:1-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겸손이란 무엇인가요?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의 이미지에 대하여 우리는 낙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낙타는 자신을 낮추어 무릎꿇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무릎을 꿇고 있으며, 짐을 지우거나 내릴 때도 무릎을 꿇고 주인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순종하는 낙타의 모습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 박사가 앨라배마에 있는 한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백인 부인이 그가 워싱턴 박사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라고 생각해서 몇 달러 줄 테니 장작을 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총장은 그때 특별한 일이 없었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 집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누구인지 주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아침에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커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그뿐입니까? 이웃을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세워주십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배워야 할 겸손에 대하여 빌립보서는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은 먼저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이 되셔서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 분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겸손의 모습이셨던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임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즉,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히 주님을 섬기게 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원리는 무엇인지 베드로전서 5장을 통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목자는 겸손하게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3).
겸손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링컨은 백악관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옆을 지나가던 대통령의 비서는 구두를 닦고 있는 사람이 대통령임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각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님께서 직접 구두를 닦으시다니요?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께서….” “이것 보게. 자기의 구두를 자기가 닦아 신는 것이 이상한가? 구두 닦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한다면 자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야. 대통령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똑같이 사랑받는 자녀일 뿐이라네.” 링컨의 비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겸손할 때에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은 배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겸손한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언제나 겸손하여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장로 된 자로서 장로들에게 권면합니다. 장로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개교회의 목회자들을 의미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날의 장로 교회의 장로의 위치가 아니라 사도로서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 개교회를 목회하는 지도자들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는 함께 장로된 자로서 장로들에게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목회자의 호칭을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하나는 장로이며 다른 하나는 감독, 그리고 목사입니다. 이는 기능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인데, 장로는 연장자로서의 의미이고, 감독은 교회를 치리하는 행정적인 측면이며, 목사는 목양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목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역 교회의 목사는 교회를 치리하는 감독이고, 양무리를 인도하는 목자이며, 교회의 영적 연장자로서의 어른과도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목사가 어떠한 사역의 자세를 갖는 가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역을 하되 더러운 이를 위하여 말고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목회자는 자원하며 즐거운 뜻으로 섬기며, 더 나아가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겸손을 잃어버림으로 인하여 양 무리의 본이 되지 못하고 더러운 이익을 추구하거나 의무적으로 사역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목사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모두 목사라고 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횡령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회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항상 양무리를 인도하는 목자로서 겸손하고 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즐거움과 소명으로 주님이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으로 격려해 주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목회자는 신학교와 친교회에서 목회자로서의 기본 자질과 자세에 대하여 끊임없이 배우며 겸손히 섬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저희 교회에서 임명받아 섬기시는 목자님들도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자로서의 자세를 함께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2-3).
첫째, 목자는 양 무리를 먹이는 자입니다. 목자는 목장 모임을 인도하면서 주일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고, 그 말씀을 양들과 함께 나눌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경건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양들과 영적인 말씀을 함께 나눌수 있는 목양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해야 합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양을 인도하는 목자로 세워졌습니다. 목자는 억지로 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원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양무리를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목자는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는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즉,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강요하는 자세로 이끌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목자는 본이 되어 양들이 따라 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본이 되는 목자를 통해서 양들이 배우며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목자로 자원하며 섬기시는 귀한 분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섬기시는 목자님들을 귀하여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으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겸손하여 영적 생활과 사역, 그리고 예배와 드리는 삶에서 본이 되어 양들을 주님께로 잘 인도하는 목자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2. 성도는 겸손하게 목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한 성도는 교회의 장로인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젊은 성도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목회자가 교회에서 지도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단에 빠지거나 심각한 윤리나 범죄한 일에 빠져서 더 이상 목회직을 수행하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권위와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를 귀하게 여김의 이유는 목회자의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영혼을 구령하며 돌보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잘 인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캘빈은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순종도 없다며,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즉 목사들이 목회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면, 모든 성도는 거만하여 함부로 뛰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젊은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의 겸손을 나타낼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간에 서로를 향하여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성도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며, 서로를 향하여 겸손한 모습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7). 가르침을 받는 자는 영적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주님의 사역을 즐거움으로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양들은 목자에게 순종하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며, 세대는 총목자에게 순종하는 모습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질서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영생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의 삶 속에 저주와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하지 않는 다른 불로 제사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레10:1-2), 노아 홍수 때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받는 자들은 다 순종치 않는 자들입니다(벧전3:20).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40년이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거꾸러진 것은 불순종 때문입니다(민14:26-39). 사울 왕이 버림받은 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삼상 15:2-3, 18-19). 불순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살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모습에서 순종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의 본을 보이셨듯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목회자의 권위와 영적인 가르침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함으로 승리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벧전 5:8-9).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마귀를 대적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과 자세는 마귀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주님의 모습을 닮아감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향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고 했습니다. 마귀는 쉬지 않고 우는 사자가 먹잇감을 찾듯이, 우리를 찾아서 삼키려고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전쟁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마귀를 대적하는 비결은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서 마귀의 궤계에 속지 않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믿음은 사탄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패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믿음을 굳게 함으로 사탄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서신서를 보내는 즈음에 사탄의 공격은 핍박과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사탄은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을 이용하였고 황제 숭배라는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공격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는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벧전 5:9)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고난을 당하지만 믿음에 굳게서서 마귀를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염려와 불안한 마음을 갖도록 공격합니다. 마음에 염려가 찾아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을 신뢰하려는 유혹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신뢰하기 시작하면 세상의 뜻을 따라서 살면서 세상의 시스템 속에 자신의 가치를 두기 시작하며 타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7-8). 우리는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짐을 맡기는 삶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벧전 4:19).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마귀에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겸손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아버지께 순종하셨고, 우리에게 본을 보이심으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 주님을 닮아 더욱 순종하는 겸손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목자인 목사와 목자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는 순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공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가 겸손으로 살아가는 주의 종에게 충만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