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9) - 팔복(2)

비전의 사람 2018. 9. 15. 17:34

마태복음(9) - 팔복(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6).

 

주님께서 가르치신 복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주님이 가르치시는 삶을 실천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의 헬라어의 의미는 행복이나 기쁨을 의미합니다. , 주님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해지면 행복해지고, 애통하면 행복해지고, 온유하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은 주님의 닮아가는 삶이 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팔복의 네 번째 복을 시작하여 여덟가지 복을 누리는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6).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는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기에 식단과 물을 찾아서 주린 배와 목마름을 채우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몸이 생존하기 위하여 갈망하는 육체의 필요인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의를 향한 영적인 갈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란 무엇인가요? 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갈급함과 목마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리에게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셔서 죄를 속죄해 주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은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다윗과 같은 영성의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은 유다의 광야에서 물이나 음식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자신의 영혼을 충만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다윗은 다윗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으로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는 예배를 사모하게 될 것이며 말씀과 교제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적인 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무엇으로 배가 부를까요? 의에 주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119:97)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119:103) 라고 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아 그 말씀을 사랑하며 종일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짐으로 배부름의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7).

 

주님은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자비입니다. 이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는 돕고자 하는 마음이며, 상처입은 자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자비의 마음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입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거나 온유한자, 그리고 의에 주린 자는 스스로 채울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채워짐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에서 자신의 죄가 용서 받기도 하고, 상처가 치유되기도 하며, 고난에서 고난을 이기는 은혜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마음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다른 사람을 섬기며 돌보며 치유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휼히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것이며,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다른 사람을 향한 적개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상처입은 자를 치유하고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긍휼의 사람은 연약한 자에게 친절하며 온유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존하기에 영적인 공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잠언서는,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14:21) 라고 하셨습니다. 복 있는 자는 그 이웃을 보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려운 사람이나 상처입은 자,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지체나 이웃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5;8).

 

주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함은 내적인 순결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올바른 양심으로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은 무척이나 소중한 곳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은 삶을 잘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 (15:18-20).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면 입으로 나와서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입에서 선한 것이 나와서 사람을 깨끗케 하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때에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은 마음에 있는 죄의 욕망을 벗어 버리고, 의에 주리가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잘못된 생각이 죄악임을 깨닫게 하셔서, 의롭고 거룩함을 따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의 청결을 위해서 회개를 하였고 하나님의 성령의 구했습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2,7,10).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정결한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을 얻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도록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말씀에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을 보며, 기도하는 가운데 그 분의 응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19:25-27) 라고 했습니다. 욥은 구원자가 살아 계시기에 그 분이 이 땅에 서실 때에 하나님을 보리라는 소망을 간증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을 주시도록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이 땅에 서시는 날 우리의 눈이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4.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화평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아버지가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은 평안의 복음이라고 에베소서에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복음이 평안의 복음일까요? 복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3-14)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화평의 관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자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는 지옥불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영원한 천국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8)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하셨고, 이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화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맡은 자로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가족이나 지체들, 더 나아가 가까운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분쟁이 있고 미워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0-21).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안과 교제의 충만을 누리기 위하여 사람들과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막히는 것은 더 나아가 기도가 막히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만일 우리가 아내와 갈등을 갖게 되고 존중으로 아내를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평적으로 맺는 관계는 수직적으로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3-24)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로부터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관계의 회복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있다면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상대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을 때에, 보통은 상대의 문제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에 관심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7:3,5)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티는 쉽게 보지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에 대하여 주님이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갈등에 있을 때에 자신의 연약함에서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사각 지대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2장에서는,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갈등이 있을때에, 어리석은 말은 상처를 주지만 지혜로운 말은 치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의 자녀들이나 배우자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완벽한 관계를 세워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에서 다툼이나 분쟁이 있을수는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사용하지 말아야 할 언어를 절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5.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5:10-12).

 

주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순교의 피는 기독교의 씨앗이 되어 전세계로 복음이 전해지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초기 삼백년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자와 싸우며 죽어갔고,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화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고문 당하고 화형을 당하며, 죽음으로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과 구별되어 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하는 순간부터 핍박이 찾아올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 큰 복이 된다고 하셨을까요? 핍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 (벧전 2:21).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자취를 따르며 그 분을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핍박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초기 기독교 지도자였던 터튤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기독교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씨앗이 되었던 것은 바로 순교자들이 흘린 피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핍박은 기독교가 성장하는 씨앗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뿌리 내리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에는 핍박과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근육이 발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근육은 의자에 앉아 있거나 편하게 있어서는 발달하지 않습니다. 근육은 스트레칭을 하거나 근력운동을 통해서 힘겨운 활동을 함으로 발달하는 것입니다. , 근육에 자극을 주고 스트레칭을 통해서 힘을 써야만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건강을 위해서는 몸에 근육이 발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같이 믿음을 자극하고 무게를 더하여 견디도록 하는 핍박을 통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도전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도전할 때에 세상을 이길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으로 인하여 핍박받고 욕을 받게 될 때에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늘에서 큰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5:10-12). 우리가 어떠한 상을 받게 될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믿음이 요구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주를 위하여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며 살고자 하는 소중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