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6) - 핑계치 못하는 이유(롬 2:1-16).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느나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가 나타나는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릴 때 자신이 처한 위급함에 절망을 느낄 것입니다. 자신은 더 이상 힘이 없어 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면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건져주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보고 누군가가 도우러 와서 도움을 주었다면 그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건져준 사람은 자신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로마서는 온 인류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32절은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그의 피조물을 통하여 보이셨기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핑계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같이 불의를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 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2장은 남을 판단하는 고상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와 절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롬 2:1).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이방인들과 비교하여 흠이 없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 중에서로다 고결한 인품을 가진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정도로 고결한 성품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사도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결한 인품을 갖거나 율법의 규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불의에 대하여 판단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행하는 비방이나 교만, 부모를 거역하며 탐욕과 같은 행위를 보면서 판단하지만 실은 판단하는 말이 실제로는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우리의 비판으로 바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2-3).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지만 우리의 눈 속에는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성은 다른 사람의 불의에 대하여 완전한 분리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우리가 하는 판단을 ‘보이지 않는 녹음기’라고 했습니다. 녹음기가 우리의 목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녹음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와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이 비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재판 앞에 서면 주님께서 우리의 목에 있는 녹음기를 꺼내셔서 우리가 한 말을 가지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은 주님 앞에서 행한 우리의 허물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조지 프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대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큰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의 불의한 공권력 행사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삶에서 동일하게 불의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위를 하면서 한인 가게를 비롯한 여러 백화점이나 상점들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물건을 훔치고 심지어는 막으려는 가게 주인을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지난주에는 한 흑인 인권가가 다른 흑인에 의하여 납치된 후에 폭행당하고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부장 검사가 술취하여 여성을 성추행한 cctv 공개 되어 큰 분노를 낳았습니다. 만일 cctv에 찍히지 않아 언론에 공개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부장검사로서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기소할 것입니다. 법정에서는 정의로운 판단을 해야 하는 직분을 가진 자가 자신의 사생활에서는 범죄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불의를 판단하는 자도 동일한 일을 하기에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아무리 인격의 고상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지키거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2. 그 사람은 회개치 아니한 마음으로 진노를 쌓기 때문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하나님은 사람을 향하여 인자하게 대하십니다. 인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선하심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하나님을 God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언어에서 하나님인 God 은 선하다 라는 Good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분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분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보기에 좋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사 45:1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거하도록 땅을 지으셨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이 골짜기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셔서 들 짐승이 마시고 해갈하게 하셨고, 공중의 새들이 샘물가에 깃들인다고 했습니다(시 104:10-12). 하나님은 산에서 흐르는 샘물로 짐승이 해갈하게 하셨고 나무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풍요로운 땅에서 농사를 지어 사람이 풍족하게 먹게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약 1:17).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각종 좋은 은혜와 선물을 하늘에서 내려주십니다. 심지어는 의인과 악인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마 5:4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시는 모습에서 풍성하게 보이셨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용납하심으로 인자를 보이십니다. 용납하다는 것은 자제하거나 관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즉각적인 형벌을 내리시지 않고 자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때에 심판을 120년 간 보류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에 대하여 인내하셨습니다. 길이 참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사사기 시대부터 바알신을 숭배하고 불의를 행하여 죄악이 관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책망하시며 회개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60년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40년간 마음에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 시대에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여 죽이고 교회 건물을 불태우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동성애를 조장하고 성적인 타락으로 세상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가 금방이라도 내릴 것만 같지만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한 사랑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도시에는 선교사들의 발자국이 찍힌 적이 없었고, 그들은 어둠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훈으로 밝게 비췬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은 채 죄를 짓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악을 따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구입하기 위해서 장정이 수년간 일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고생을 하고서도 장정이 수년간 일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탁자에 놓여 있고, 거의 방마다 성경 사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아닙니까? 어디 가나 성경을 구할 수 있고, 어디 가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풍성히 드러난 하나님의 인자를 뚜렷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풍성한 자비를 멸시하는 것입니까? 이게 작은 일입니까?”
하나님의 인자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과 같이 하나님의 인자를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멸시하고 자기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자기의 고집으로 회개치 아니하는 것은 댐에 물이 쌓여 가듯이, 자신의 머리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진노를 쌓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것을 재산을 부지런히 쌓아가나 정반대로 재산 때문에 멸망하게 될 욕심 많은 사람의 상이다. 그 사람은 막대한 금화를 모아놓고 그것을 침대 위의 다락에 감추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금화를 여러 해 동안 보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을 자고 있을 그 무거운 금화가 천장을 뚫고 떨어져 침대를 덮쳤고, 그는 금화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는 금화가 구원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죽임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죄를 쌓는 사람들의 미래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임할 그 날을 위하여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진노를 피하기 위한 해결책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그 사람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롬 2: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십니다. 보응은 다시 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려주시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행위로 심은 것에 대하여 심판 날에 그 대가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참고 선을 행한 사람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6).
하나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상급을 주십니다(롬 2:6).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칫 선을 행하는 행위로 영생을 얻는 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나님의 은혜는 값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은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다윗과 같은 존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선을 행하는 삶을 강조한 것은 구원받은 자가 맺는 삶의 열매를 강조한 것입니다. 선은 영생을 가진 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는 자의 상급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상급으로 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에서 존귀함과 평강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으로부터 도망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7-8). 다윗에게 풍성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광과 존귀, 그리고 썩지 아니하는 부활의 소망을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영생을 누리며 영광과 존귀와 평강의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그 생명의 소중함은 영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알기에 선을 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 가지 핍박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믿음의 자녀들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불의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한 진노입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8).
하나님께서는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에 대하여 진노하신다고 했습니다.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노하시고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롬 2:9). 선을 행하는 믿음의 사람은 평안의 복을 누리지만,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환난과 곤고가 찾아옵니다.
악인은 자기 고집으로 회개하기를 거절한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을 짓는 삶을 살아갑니다. 당을 짓는 것은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self-seeking selfish ambition)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겸손을 버리고 자신의 유익과 욕망을 따라 자신이 왕이 되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은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불의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을 높이고 진리를 따르지 아니했던 자가 사울왕입니다. 그는 진리를 버리고 불의를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그의 마음에 있는 우상을 파괴하지 못하고 불의를 따르게 됩니다. 그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찾아왔고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다고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였습니다.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에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자기를 추구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11).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같은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이유는 그들도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하시기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심판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이방인이라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가진 자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거짓을 믿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회개하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있는 성전을 의지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렘 7:4).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에 큰 자부심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도적질하고 살인하며 간음하는 죄에 대하여는 무감각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을 숭배하는 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성전과 율법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율법을 범하는 것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은 죄를 정죄함으로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성전에서 한 바리새인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고 가로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 온다고 믿고 감사했지만, 자신이 마음에 가득한 불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믿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율법 없이 범죄하는 자도 율법 없이 심판을 받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롬 2:12). 율법 없는 자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율법이 없기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없는 이방인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증거가 되어 율법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본성으로 양심을 주셨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할 때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거나 도적질하거나 부모님께 불순종할 때는 양심이 경고를 해 줍니다. 양심을 따르는 것은 바른 길을 걷게 하지만, 양심을 저버리는 것은 불의의 길로 가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이 화인 맞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마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셔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은 율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이 증거가 되어 심판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은 하님의 심판하시는 날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롬 2:16).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진 은밀한 죄까지도 모두 심판할 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회개치 아니하는 고집된 마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에 쌓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사망 가운데 있는 죄인이 영생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