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고난은 고통이며 아픔을 의미합니다.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는 알수 없지만 에덴 동산에서 죄를 범한 이후에 사람들에게는 고난이란 것이 인생과 더불어 동반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면서 찾아오는 고통은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아무리 노후 대책을 잘하거나 건강 관리를 잘 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육신이 연약해지고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며, 실수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 1:2-3)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2)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 3:13). 사람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며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생에서 낙을 누리지 못하는 고난의 시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믿음의 우산이 고난을 막아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해석으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값진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살아가는 것이 궁정의 삶보다 더욱 소망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영성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도 고난의 시련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난의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고난은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왜 하나님은 고난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믿음의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성경에서 가장 큰 고난을 받은 사람 중에 포함됩니다. 성경에서 고난을 당하는 자는 욥기를 펴서 읽곤 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의 교과서는 욥기입니다. 욥은 고난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 그리고, 성경은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욥 1:3)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욥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은 의롭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욥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난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욥의 종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큰 바람이 불어 집이 무너지면서 하루 아침에 욥의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 1:21).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욥의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욥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가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욥 2:7-8). 그러한 고통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 2:10). 욥의 신실함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는 모습으로 검증되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욥은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5:10). 욥이 감당해야 할 고난은 하나님이 욥을 연단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연단을 인내함으로 감당하면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정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했습니다. 정금과 같은 믿음은 순금의 믿음으로서 믿음에 불순물이 없는 순결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기를 원할까요?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믿음의 선포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극한 시련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아픔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 1:8-9).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인생의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릴만큰 극도의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육신의 고통은 오히려 마음으로 하나님 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 ...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 1:9).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만을 철저하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에 백성이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목마름을 해소시키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2. 고난은 성품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가 언제인가요? 사람이 가장 고난의 시간을 당할 때에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이 가장 고난의 시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될 때에는 자신의 힘을 의존하게 되고 자칫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망의 골짜기를 걷게 하시고 광야를 걷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은 믿는 자를 통하여 주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분의 인격이 믿는 자를 통하여 풍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질그릇의 목적은 보배를 간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질 그릇인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이시며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인격을 드러내려고 하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3:7-11).
우리의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도록 고난과 답답한 일과 박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은 그 분의 생명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사시는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죽을 몸인 육신을 통하여 그 분의 인격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도록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주님을 닮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고난의 목적은 우리 자아의 깨어짐입니다.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보배가 빛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깨어질 때에 감추어진 보배가 빛을 발하고 그 존재가 드러나듯이, 우리의 육신의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감추어 버립니다. 깨어지지 않은 인생은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질그릇 안에 감추고, 자신만이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예수님의 영광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고난의 극한 상황에서 자아가 깨어지게 하셔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능력과 보배는 에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자아가 깨어질 때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3: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절망으로 위장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깨어진 자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미를 알며, 고난의 시련에서 겸손하게 된 자가 교만의 위험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고난과 시련은 절망의 신호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고난으로 우리를 연단하시고 겸손하게 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3. 고난은 믿음의 지경을 넓혀 줍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 2:24-2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셔서 믿음의 지경을 넓히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믿음이 강해지고, 인격이 변화되어 주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지경을 넓히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게 하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스라엘의 순종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로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통하여 종노릇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의 비전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고통을 통하여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믿음의 지경을 넓혀서 하나님의 나라와 거룩한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만큼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의 비전이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녀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난이 없었다면 비옥한 나일 땅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나일강의 비옥한 땅이 가나안의 광야와 산지 지형보다 더 낳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8:1-4). 초대 교회에 일어난 스데반의 순교와 핍박은 믿는 자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진 자들에 의하여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 민족에 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선교의 시작은 사도행전 8장 1절부터 였습니다. 핍박은 초대 교회가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게 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의 잠든 영성을 깨우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안에 내재되어 있는 믿음의 잠재력을 키워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통하여 자신 안에 내재된 믿음의 능력을 키웠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고난을 통하여 순결한 믿음의 잠재력이 깨어나게 했습니다. 다니엘은 고난 속에서 지혜와 순수한 믿음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다가올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사역의 지경을 넓혀 나갔습니다. 욥은 고난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의 믿음의 깊이도 한결 깊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영성은 고난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이 넓여야 할 지경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지경을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능력을 깨워야 합니다. 하나님 세상을 향한 담대히 선포해야 할 복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번 장례예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목포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복음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서 겪었던 고난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 고난을 감추고 싶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합려갛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어제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난은 미래의 더 나은 우리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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