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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8) -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롬 3:1-8).

비전의 사람 2020. 7. 8. 16:19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로마서는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16)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증거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복음이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18).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를 막고 억누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방인의 우상 숭배와 불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 종교인들과 같이 사람의 잣대로 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양심이 율법이 되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지고 할례를 행한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가 참된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의미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2:28-29). 참된 유대인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하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의 변론에 대하여 반박합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면 유대인이 다른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냐고 물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운 것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각 질문에 답하며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같이 정죄 받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유대인의 질문과 사도 바울의 답변에 관한 설명입니다.

 

1. 유대인의 나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유대인들이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면 유대인이라는 장점이 전혀 없는 것인지 묻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증거로서 할례의 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유익은 범사에 많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스라엘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4-5).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양자로 삼으셔서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께서 시내산과 성소에서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광야에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구별된 거룩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약속들이 있어서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주신 약속과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신실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지만 어떤 민족보다 거칠고 힘든 역사를 견디어 냈습니다. 그들은 400년 노예 생활을 하였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였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가나안에서도 끊임없이 주변 민족들과 전쟁하며 승리와 패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남과 북이 나뉘어지는 아픔을 겪었고, 그 후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왕국은 멸망한 후에 바벨론에 70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은 헬라와 로마의 압제로 인하여 나라가 빼앗기고 멸망합니다. 그리고 2000년간 전 세계에 흩어졌다가 20세기 초반에 히틀러에 의하여 육백만 명이 학살당하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셔서 이스라엘 나라가 기적적으로 다시 세우셨고, 앞으로 주님이 다스리는 천년 왕국의 중심이 되는 나라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큰 영적인 유산을 가진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유산이 유대인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는 방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다른 민족보다 나은 것 중에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계시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분의 뜻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창조에서 종말까지의 하나님의 시간 계획을 계시하셨고, 죄인된 인간의 모습과 그들의 필요인 메시야와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는데, 영감은 하나님이 호흡하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호흡하신 것은 영적인 것으로 살아있는 생명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가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씨로서 구원을 주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영원한 말씀으로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합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이와같이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썩지 아니하는 씨이며, 우리를 거룩하게 함으로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며 의로 교육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삶에서 거룩하게 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을 소유한 것이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고 침례에 순종하고, 성경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의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지 못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3:3).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반박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3:3). 일부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믿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미쁘심에 실패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3:4)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맺은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약속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통하여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나실 것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 분의 모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애굽에 가서 하갈이라는 여인을 데리고 와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불평하고 원망하였고, 심지어 시내산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을 거부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모압 평지에서는 바알 숭배에 빠져 우상 숭배와 이방여인과의 음행의 죄를 범했습니다. 가나안에서는 이방 신들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와 더불어 그들과 결혼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실패합니다. 그들은 솔로몬 이후로 지속적인 타락을 거듭하다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대에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를 믿지 않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핍박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유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느냐는 질문에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고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3:4)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거짓되지만 오직 하나님은 참되셔서 그분의 모든 약속을 지키신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그 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11장에서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을 남겨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믿지 않지만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11:25-26). 이는 칠년 대환난 기간에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받는 것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다윗의 고백을 인용합니다. “...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3:4). 사도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시편 514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다윗이 밧세바와 음행의 죄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그 후에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죄를 책망하자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이 의로우심을 고백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을 책망한 후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선포했습니다. 그의 죄에 대하여 다윗의 회개를 통하여 용서하시지만, 그는 죄의 결과를 감당해야 했습니다(삼하 12:10-14).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의 처를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대낮에 다윗의 처와 동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와의 음행으로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악을 행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의로우시고 하나님의 판단이 순전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않은 모습으로 범죄했지만, 그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자신이 그 값을 치루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믿음 없는 삶의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도전하곤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거나 거짓된 삶에 대하여 잘못된 열매가 나올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욥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신실했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신실한 욥에게 닥치는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서 신실하게 함께 하셨고 고난을 통하여 그의 믿음의 증명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갑절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이 항상 옳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그의 판단으로 항상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3. 유대인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의롭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불의하시냐.”(3:5).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을 할 것이냐고 비아냥 거립니다. “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3:5). 유대인의 논리는 그럼 우리가 불의를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하는 바울이여, 우리의 불의는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리는 자신들의 불의가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영광이 되는 도구이기에 어찌 죄인처럼 심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3:7). 유대인은 자신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진실되심을 더 풍성하게 나타내어 그 분의 영광이 되기에 자신들은 죄인처럼 심판을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논리는 자녀가 가게에서 장난감을 훔친 후에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버지가 정직함을 보이게 되었기에 자신은 아버지를 빛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입니다. ,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고 답변합니다. “...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3:5-6). 사도 바울은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유대인의 미덕이라면, 그 미덕은 이방인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불의하시냐고 묻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에 심판을 피한다고 믿었지만, 이방인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어쩌면 유대인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이스라엘을 무너트렸던 앗수르와 바벨론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시대에 유대인을 핍박하는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만일 유대인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심판을 피할 수 있다면, 이방인의 불의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듯이, 유대인의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논리가 틀리다는 것을 이렇게 변증합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한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3:7-8).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풍성하게 하여 그의 영광이 되면 자신도 어찌 죄인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겠느냐고 응답합니다. 즉 자신이 거짓말을 해도 죄인처럼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자신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그들의 논리를 반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하여 악을 계속적으로 행하자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주장하는 괘변을 반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로 인하여 그 분의 진실성이 입증되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따라 거룩과 사랑과 은혜안에 거할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같이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3:8)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대인의 괘변과 같은 논리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모태 신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구원의 증거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그를 유대인들과 같이 외적인 종교 생활에 만족하다가 결국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빠지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지고는 부족하여 율법의 행위와 같이 의로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과 율법을 혼합하는 것으로 구원의 길을 막는 종교 생활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후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기에 아무런 회개나 죄에 대한 뉘우침이 없습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 구원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그 후에는 새 생명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본성을 받았기에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구원받은 후에 자신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따라 거룩과 신실한 믿음의 삶으로 순종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