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7) -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

비전의 사람 2025. 8. 30. 21:19

고린도전서 강해(7) -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시골에는 농사를 하는 농부가 필요합니다. 바다에는 고기를 잡는 어부가 필요합니다. 어부가 없다면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는 생산을 하는 직원이 필요합니다. 스포츠에는 운동 선수가 필요합니다. 손흥민 선수와 같은 뛰어난 선수 한 사람의 영향력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도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일꾼을 부르시고 훈련하시고 세워가십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추수할 일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들의 곡식이 익었는데, 들에서 일할 일군이 없다면 추수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서도 주님께서는 그 분의 일꾼을 세우셔서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은 하나님의 일군인 사역자와 성도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동역할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에서 책임을 맡아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꾼으로서 섬길 때에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격려도 받기도 하지만, 낙심하거나 실망할 때도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4장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 그리스도의 일군은 항상 충성스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사도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 같은 교회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군이라는 단어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이는 자입니다.

 

과거 벤허 영화에 보면 벤허가 노예로 팔려간 후에 배에서 노를 젓는 장면이 나옵니다. 과거의 배는 동력이 사람들이 힘써서 젓는 노였습니다.

 

노를 젓는 자는 자신의 기분이나 생각대로 노를 젓지 말아야 합니다. 이십 명의 노젓는 자들이 각자 노를 저으면 배는 방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젓는 일군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모두가 함께 노를 젓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군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나의 지휘관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와 교회가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지휘관은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함께 노를 저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깊은 고민도 하고 방황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함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로서 집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입니다. 청지기는 자기 뜻대로 주인의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을 잘 관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청지기는 복음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복음을 잘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충성인 것입니다. 충성이란 신실하고 변함없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충성스러운 자는 환경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며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충성스러운 성품의 사람입니다. 주인이 맡긴 것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는 자가 충성스러운 자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충성스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충성스러운 일군들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섬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3:1-2, 6)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세우신 아버지께 충성하심으로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시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면 마지막까지 완수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면서 하나님께 순종한 종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돌에 맞거나 구덩이에 갇히기도 하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가 기뻐하는 소중한 아내를 취하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도 흘리지 말고 애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의 파괴에 대한 상징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성전이 파괴될 때에 그들은 너무나 큰 고통으로 인하여 애도할 여유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스겔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24:18). 에스겔은 아내가 죽는 아픔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슬퍼하거나 애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물론 성경이 애도를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의 시대에 특정한 상징적인 의미로 애도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잠언은 충성된 사자는 추수하는 날의 얼음 냉수 같아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25:13). 더운 날 먹는 얼음 빙수는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듯이, 충성스러운 청지기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된 종은 양약과 같아서 큰 유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13:17).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청지기입니다. 주님의 청지기로서 우리는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일군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하나님의 일군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다가 낙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판단으로 인한 어려움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듣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사람들의 날선 비판을 받으면 위축되거나 낙심하곤 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판단은 고린도 전후서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다른 지도자들과 비교하며 평가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볼로는 뛰어난 웅변가로서 감동을 주는데, 바울은 말은 약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고후 10:10). 그들의 판단은 단지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파당을 만들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비량으로 텐트 메이커를 하며 사역을 하자, 그들은 사도 바울의 격이 낮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로부터 자신의 권리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비량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육체대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와 성공, 세상의 지혜를 높이 평가했기에, 사도 바울이 고난 당하며 사역하는 모습을 도리어 비판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고난만 당하는 사도가 무슨 능력 있는 사도냐?’라며 판단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판단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이 그의 사역의 동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은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서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사도 바울은 자신도 자신을 판단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역과 삶이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 항상 올바르게 볼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위배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의롭다라고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종의 자세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하루 종일 양을 치고 밭을 갈고 돌아오자 주인은 잘했다라고 하지 않고 또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종이 볼 때는 억울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종으로서의 당연한 직무였던 것입니다. 도리어 종에게 내가 먹을 동안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17:10). 충성스러운 종은 자신의 일에 대하여 칭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주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판단하실 분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가 아니라,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면 어두움에 감추인 것이나 마음의 뜻, 즉 동기까지 나타내셔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주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일군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사람들의 비판으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상처를 받은 적도 있고, 다른 지체들이나 사역자들에 대한 비판이나 판단을 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역자를 판단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형제를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 서리라.”(14:10). 사도 바울은 형제를 판단하는 것을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것을 여겼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분은 주임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에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각자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께 속한 자이기에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나 사역자를 판단하기 보다는 위해서 기도하며 격려하며 일어서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만이 우리를 판단하고 심판의 날에 큰 칭찬과 상급을 내리실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일군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쟁하자, 자신과 아볼로를 가지고 교훈을 주었습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고린도 교회는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서 행하는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체들이 교만하여 서로를 대적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고 세 가지의 질문을 했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우리가 구별된 것은 세상에서 택함을 입어 구원받은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삶은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가지고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모순인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찾아오는 것이고,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착각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전 4:8).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배부르고 부요한 듯 착각하고 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육신적인 교만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실 나라에서 그들과 함께 왕노릇 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나라에서 왕같이 다스리는 날이 찾아오지만, 지금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 사역의 현장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다고 여기며 왕노릇하듯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위하여 낮아지며 겸손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의 낮은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 ...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고린도 성도들은 사회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높아지기 위하여 분열하고 사도를 판단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애쓰는 사도 바울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낮아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약하고 비천하며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살아가야 해씁니다. 모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삶을 가야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 하고 강하다 여기며 스스로 왕노릇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가야 할 길은 비방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으며 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을 깨우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행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쓰는 것이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고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군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비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충성스러운 일군으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