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사는 삶(10) - 하나님의 의로운 종 (사 53장)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1).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유대인 신학생과 함께 수업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후에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와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학자들도 이사야 53장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종이 고통당하여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언급된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BC 800 여 년경에 기록하였고, 그의 예언서를 통하여 오실 메시야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한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하셨습니다. (사 53:1-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는 자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팔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의로운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베푸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복음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아름다운 용모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는 연한 순 같다고 했습니다. 연한 순은 뿌리에서 돋아 나는 순으로서 연약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습니다. 마른 땅은 사막이나 황무지를 의미하며, 이와같은 땅에서 나무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종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자랐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자 헤롯이 죽임을 명하여 당시의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은 어려운 시대에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시며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에 대하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운 모양이 없는 것은 외형적으로 볼품이 없으며, 풍채가 없는 것은 위엄이나 존귀함을 느낄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적인 모습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는 다음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은 멸시를 받은 자가 되어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멸시를 받는 것은 업신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이유 없이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간고는 고통을 의미하며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해야 하셨고, 질고를 아는 자로서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질병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을 아시는 분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였기에 그 분을 멸시하게 됩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3). 하나님의 백성들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지 않고 멸시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0-11)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분의 백성이 그 분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핍박하고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에 침례 요한은 그 분을 알아보고 그 분을 경배하였지만, 백성들은 주님의 기적을 보고 따랐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주님의 가르친 진리로 인하여 돌을 들어 죽이려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주님에게서 아름다운 것이나 흠모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멸시하였듯이, 세상은 교회와 성도를 멸시하기도 하고 핍박하여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디며 주님의 때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빛되신 주님을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주님은 우리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들을 감당하셨지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징계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지만,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과 죽음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분이 가신 길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찔리시고 상함을 입으셨습니다. 찔림은 ‘구멍을 뚫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함은 뼈까지 으스러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뼈까지 으스러지는 아픔과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셨습니다. 그 분이 이러한 아픔의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22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시 22:14-17).
예수 그리스도의 찔림과 상함의 모습을 시편 기자는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뼈가 어그러지고 마음이 촛밀 같이 녹았고 혀가 잇틀에 붙어있는 모습은 극도의 고난 가운데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손과 발을 못으로 박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군인들의 채찍으로 인하여 살이 떨어져나가 몸의 뼈가 보일정도로 몸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기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음으로 치유를 얻게 됩니다. 나음을 입는 것은 회복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인하여 우리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이 땅에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떠맡기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시도록 하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의 심판으로 영원한 지옥에서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살인죄를 벌할 때 사용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희생자의 시체를 살인자의 몸에 묶고 강제로 끌고 다니게 하다가 그 부패한 시체 때문에 살인자마저 죽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짐을 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묘사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몸에 묶인 부패한 시체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죄, 우리를 썩게 하는 그 영향력에서 떨어져 나와 사죄의 기쁨을 누린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인 것이다.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가운데서 종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주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외압적인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합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돌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마 27: 27-32).
주님은 로마 군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군인들이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침을 뱉고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이끌었습니다. 골고다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고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러서 피와 물이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종의 모습은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시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기에 어느 누구도 형벌 받아야 할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생각한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서 주님은 강포를 행치 아니하셨고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습니다. 강포는 폭력적인 행동을 의미하며, 궤사는 속임수나 거짓말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희생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신 후에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고,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묘지에 안장하게 됨으로 이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처럼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 22-23). 우리도 주님을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세상의 어려운 상황에 갇혀 고난과 시련을 견뎌야 하는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신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극한의 어려운 상황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시고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상황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분하고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과 같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탁하며 그 분의 은혜안에서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 10).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인 메시야가 상함을 받고 질고를 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속건제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에 사용된 ‘제물’을 의미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대속적 죽음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인하여 그 씨를 보게 될 것이며 그 날은 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씨는 그 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들의 날은 영원할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혼의 수고로 인하여 만족히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1).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사 53:12)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영혼을 희생하여 사망에 이르렀고 십자가에서 범죄자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중보사역을 지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주님의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셔서 죄의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구유에서 나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메시야는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의 예배와 존귀를 받으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고난당하는 종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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