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 -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부르심 (마 4:12-22).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9)
지난 주에 저는 주부 목자님의 카톡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목장의 지체를 위해서 복음을 그림과 글로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매님의 가정에 찾아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목장의 자매님이 다시 한번 들으시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시고 구원의 확신을 얻으셨습니다. 저는 주부 목자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 사역을 인하여 너무나 기뻤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의 기쁨은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이었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천국의 기쁨인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기쁨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마치신 후에 갈릴리 지역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이 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셨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역사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앗수르, 바벨론, 애굽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여러 차례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로 인하여 사마리아와 같이 혼혈과 혼혈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이방인들과의 혼합성이 강하여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주님의 사역이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 사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러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4-16). 이는 이사야서 9장 1-2 절의 말씀의 성취를 의미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18대 왕 베가의 때에 앗수르 왕에 의하여 갈릴리 지방의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나 후에 그들을 석방하여 자유케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1-2) 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들에 의하여 많은 수난과 고난을 당하여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어둠의 땅에 빛을 비추시고 그늘진 땅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갈릴리 지역이 많은 외세의 침입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빛이 그 땅에 비취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기의 고통과 6.25 전쟁으로 인한 큰 아픔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어두운 땅에 빛이 비추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빛이 비취는 은혜를 누리는 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큰 복을 받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 부흥과 영적인 부흥을 경험했음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갈릴리 지역의 사역은 소망이 없는 땅에 소망이 되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타나심은 영적인 사역이었기에 그 소중한 가치를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빛되신 주님의 사역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
주님의 외침은 죄악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웠기에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시면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자들을 부르신 주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우리들의 삶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잃은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선 순위를 두고 하신 사역은 제자들을 불러서 훈련하는 일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을 가르치신 우선순위는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는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는 죄의 권세 아래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며 인생의 종말은 지옥불의 고통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한 현실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인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사야 53 장의 고난당하는 종의 실체이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구원을 위한 대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동안 잃은 자를 찾으러 다니셨고, 그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심으로 영생을 주시며 구원하셨습니다. 여리고를 지나가시다 삭개오를 만나셔서 회개하고 주님을 믿은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변화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 1:3-4).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셔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생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하여 제물의 피를 드려서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생명으로 사시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그 분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후 6:16).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를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우리는 주님과 같이 닮아가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영광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얻었기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주님과 같이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49, 51).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영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으로서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생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선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귀한 선물은 영적인 눈으로 볼수 있는 것이기에 믿지 않는 자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19-20).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만이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기쁜 복음의 소식을 세상이 듣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3-15). 누군가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듣게 되고, 듣는 자가 있어야 믿게 되며 믿는 자가 있어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좋은 복음의 소식을 듣는 자는 구원을 얻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7장에는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둘러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성문에 있던 문둥이가 우리가 여기에서 죽느니 차라리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고 합니다. 그들이 아람 진영에 이르니 아람 군대는 한 사람도 없고 그들이 급히 남겨두고 간 금과 은과 의복, 그리고 음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급하게 도망하느라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음식을 먹고 금과 은, 그리고 귀한 의복들을 감추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열하 7:9). 문둥이들은 이와같이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에 자신들이 잠잠하면 화가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굶주린 성에 가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음식을 취함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문둥이들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소식으로 인하여 성안의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스엔젤리스 근교의 한 남자가 집으로 귀가 하는 중에 지진을 만났습니다. 차릴 갓길에 대고 공포에 떨고 있다가 지진이 잦아진 뒤에 운전을 하고 가는 중에 갑자기 앞차의 후미등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차를 세우고 살펴보니 다리가 끊어져 낭떠러지로 차들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는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고 나가서 지나가는 차를 세우려고 하자 운전자들은 자신을 술주정뱅이로 인식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순식간에 4대의 차가 사라졌습니다. 이 네 대의 차들은 모두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때 대형 버스가 달려옵니다. 그는 이 차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도로 가운데로 달려가 손을 흔들며 버스를 세우려 했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겨우 버스가 서게 되고 사고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 운전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버스 기사는 자신의 버스를 옆으로 돌려 바리케이트를 만들어 사고를 막았습니다. 이는 전도를 하다 보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소식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비록 세상에서 전도를 하다보면 세상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받아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 아니면 사기꾼이다. 예수를 전하려고 애를 쓰는 선교사가 아니면 천국과 지옥을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체하는 사기꾼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영혼들을 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고의 위험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옥의 형벌을 알리는 것이고, 그 형벌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9).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셔서 훈련하신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지상 사명을 주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 주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를 삼는 비결은 세상에 가서 복음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침례를 주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영혼들을 사랑하고 빛되신 주님께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아픈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주님이 바로 복음의 실체이신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한 영혼을 구원하며 마음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 사람을 전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즉, 우리의 부르심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사용합니다. 그물을 바다에 던져 고기를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어부는 고기를 잡기 위하여 바다에 나아가 여러 곳에 그물을 던졌다가 시간이 되면 끌어 올립니다. 이와같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그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관계는 사랑을 전달하거나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애경사에 관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격려를 해줄때에 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가까운 관계도 있지만 스쳐 지나가는 관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의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주님께로 인도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통해서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관계를 통해서 전달될 때에 가장 잘 전달됨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에는 안드레가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요 1:40-42).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하여 제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 1:46).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 말로 전도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속에 ‘와 보라’ 고 전달해야 할 나다나엘이 누구인지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위대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보배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야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발걸음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구령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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