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8) - 팔복(I) (마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1-2).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나라인 세상에서 건져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즉,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으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요? 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새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깊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 존 뉴톤입니다. 그 분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시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존 뉴톤은 1725년에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님은 성경을 뉴톤에게 가르쳐주던 경건한 여인이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후 존 뉴턴은 선원이 되어 아버지를 따르다가 해군의 장교로 복무하다 탈영하게 되고 결국 체포되어 15개월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석방된 존 뉴턴은 노예선의 선원이 되어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잡아 영국에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가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존 뉴턴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오다가 폭풍을 만나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뉴턴은 어머님이 가르쳐 주었던 기도를 생각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폭풍에서 자신을 지켜주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전에는 노예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윌버포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노예폐지운동을 하도록 했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Amazing Grace (나같은 죄인 살리신)’라는 찬송시를 작곡하게 됩니다. 존 뉴턴은 그 후에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는 평생동안 자기와 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죄에 매여서 종살이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전력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기에 항상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다 할지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내가 과거에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내 목숨이 다하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 심부름꾼 존 뉴턴은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용서받았고 또 자기가 오랫동안 대적하고 파괴하려 했던 믿음을 오히려 전하게 되었다...”
존 뉴턴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의 나라에서 세상의 가치대로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성품을 얻게 되었고 새로운 가치를 통해서 자신이 생업으로 삼았던 노예 제도를 회개하고 이제는 노예 폐지운동을 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변화된 자의 변화된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양식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팔복과 산상수훈의 말씀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즉, 옛 본성과 의지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치신 삶의 원리를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고 이와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분별력과 순종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팔복의 의미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우리는 심령이 가난 한 자에 대하여 두 가지의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재정적인 가난입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가난한 자들이 주님 앞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한 땅이나 밭이 없었고, 심지어는 먹을 양식도 부족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박으로 고통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헤롯왕의 과도한 건축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세금이 수탈되고 있었고,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일할수 있는 곳이 없어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난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복있는 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가난입니다. 영적인 가난은 자신의 마음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요? 이는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왕이신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의가 더러운 누더기와 같음을 깨닫고 더러운 자신의 죄를 보면서 회개하는 자입니다. 자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자인 것입니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이 가득하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세상의 부귀 영화로 만족하기에 그리스도의 의와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왕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함을 얻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영적으로 가난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이 가난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영이 가난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순종의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부요함을 주님과의 충만한 관계를 통해서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묵상하며 생명의 꼴을 얻어 영적으로 강건해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기도의 삶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음을 인식하고, 철저히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애통하는 시간들을 종종 만납니다. 우리가 만나는 슬픔은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하는 삶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슬픔의 순간을 만날 때가 언제인가요? 우리가 신뢰했던 우정이 깨어지거나,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질 때에 아픔을 겪습니다. 때로 우리는 소유했던 재산을 여러 가지 이유로 잃어버리면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가장 아픈 순간은 가장 사랑했던 배우자나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통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애통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면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위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슬픔의 때를 만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때를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스패포드 교수는 시카고의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큰 역경을 이기는 과정에서 ‘내 평생에 가는 길’ 이라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변호사로서 시카고의 부동산에 크게 투자했는데 시카고 대화재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디와의 절친으로서 무디가 영국에서 집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쉼의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네 명의 자녀들을 먼저 배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1873년 12월 22일에 출발하던 배가 영국의 배와 정면으로 출동하여 226명을 실은 배가 파선하게 되며, 그의 네 아이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그는 홀로남은 부인으로부터 ‘홀로 생존’이라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에 무디 전도 집회에서 자녀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배를 타고 가면서 선장으로부터 배가 가라앉은 곳을 바라보면서 크게 애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평안에 대한 찬송시를 다음과 같이 작사하게 되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가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영혼 평안해 내영혼 평안해.” 스패포드의 인생에는 두 가지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시카고 대 화재 때 그의 재산을 잃었고 또 물속에서 네 자녀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패포드는 이러한 시련 가운데서도 “내 영혼은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에서 슬픔으로 인하여 애통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애통함을 위로하시며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2-3).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모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슬퍼할 때에 주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주님은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며 재를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대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 고통 가운데 함께 하셔서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하나님이 가장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기에 한시도 떠나지 아니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슬퍼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3-36). 주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슬픔은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에 찾아오셔서 큰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온유함이 약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것을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온유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강한 사람들의 특징임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 11:29)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모세도 온유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에 이백 만명을 광야에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 12:3). 모세의 온유함은 내적인 강함이 외적인 온유로 나타난 것입니다.
온유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온유는 영어로 gentle 또는 kind, 즉 온화하며 친절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하지만 수용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입니다. 온유의 헬라어는 길들여진 야생말을 의미합니다. 야생말이 길들여지면 자신의 힘을 절제할 수 있고 주인을 위하여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마음의 원한을 복수하거나 폭력적인 언어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통해서 나타나는 자인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관계에서 찾아오는 갈등을 피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상대가 아무리 과격하게 말해도 온유한 대답으로 상대의 분노를 누그리기 때문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5:1). 우리가 화를 내면 상대도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화하며 친절하게 대답하면 상대의 화가 누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잠언 25장은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잠 25:15) 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래 참으며 진지한 자세로 말하면 설득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혀, 즉 온유한 언어는 듣는 자의 강팍한 마음을 누구러 뜨리는 것입니다. 뼈는 단단한 신체의 부분이지만, 그 강한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온유한 마음에서 나오는 온유한 언어입니다.
모세는 온유한 자였지만 순간 순간 분을 품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정하지 못하면서 큰 죄를 범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을 조절하지 못하면서 애굽 사람을 살인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십계를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자 화가 나서 십계명을 던져서 깨트렸습니다. 그는 다시 산에 올라가서 십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라하자 바위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가나서 바위를 지팡이로 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 37:11)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땅은 이 시대의 기업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주시는 기업인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주님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예수님의 온유함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표현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온유함은 온화한 성품과 친절하고 상냥한 언어로 가족과 지체들에게 먼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평안의 은혜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존 뉴톤의 변화가 그리스도가 주시는 새 생명이었듯이, 우리들의 모습의 변화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하신 복되고 행복한 삶은 심령이 가난하게 살아감으로 주님을 날마다 의지하는 것이며, 애통하는 자로서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의 위로를 받는 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을 누리는 자는 교만하거나 거만한 자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온유한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발견되는 주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의지하며 그 분의 능력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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