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5) -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원리 (마 3:13-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 3:15).
마태복음 3장은 침례 요한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자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 40:3).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3:2) 였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는 자들은 그에게 나아와 침례를 받았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마 3:6).
당시에 침례는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한 의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의 의식으로서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에 잠기는 침례의 의식에 참여하기도 했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도 침례를 통해서 유대교로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침례요한은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마 3:10). 이는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한 것입니다. 침례요한이 선포한 회개는 감정의 동의 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회개의 의미로 침례 요한에게 나아가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에게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유대 사회에 영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이후 사백년 만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섭리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요단강에 오셔서 침례를 받기 위해서 침례 요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때 침례요한은 주님의 침례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침례 요한과 예수님은 사촌 지간으로서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지금까지 침례요한이 지켜본 예수님은 죄가 없는 삶을 사셨기에 회개를 위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침례요한은 주님을 향하여 겸손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4). 침례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침례요한은 요한복음에서 “ ...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7) 라고 했습니다. 이는 침례요한은 주님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침례를 받는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침례 받으시는 장면이 주는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영적인 원리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은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4).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러 나오시자 말리게 됩니다. 침례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였기에,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침례요한에게 나아왔던 자들은 죄인들이었고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내적인 회개를 침례를 통해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포악한 군인들이었고, 세금을 포탈하는 세리였으며, 간음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이 바라본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신보다 더욱 거룩한 자였습니다. 사실 그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자로서 성육신 하신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침례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회개하는 침례를 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굳이 예수님도 침례요한의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침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요 4:15)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침례를 받으신 이유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혼자서 의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침례요한과 함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침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시며 동참하신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주님의 사역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의 사역에 참여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침례 요한의 설교와 사역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후에 침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자신의 딸인 헤로디아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목을 베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외로운 영적 사역의 무거운 짐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침례요한의 사역에 힘을 실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침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침례의 사역에 동참하심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격려를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거룩하며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의 사역은 단지 침례 요한만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동참하여 격려하며 힘을 실어주는 사역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침례요한의 사역에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사역에 참여함으로 힘을 더하며 격려를 줍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인 싸움을 최전방에서 싸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같은 깃발을 들고 자신을 희생하며 그 사역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 한 신학생이 매일 복음 전도를 하는 사역을 저에게 소개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 분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혼자 전도하러 가는 일에 동참하여 함께 구령하는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함께 함으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테네시 템플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도 여러 신학생들이 모여서 주말에 시내의 중심지에 가서 거리 전도를 하는 일에 뜻을 모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에 함께 참여함으로 서로에게 격려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지체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한 명이 참여하고, 또 다른 한 명이 참여함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건축이 되며 새로운 사역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제자훈련 사역에서도 어떤 지체들은 성경을 배울 필요를 못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참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이유로 참여하든 지체들의 뜻이 모아지면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은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신 적도 없으셨기에 회개가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이 선지자인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겸손은 스스로를 낮추시고 침례에 참여하심으로 침례요한의 사역을 지지하고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주님께서는 침례에 참여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의 사역에 참여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함께 이루기를 기뻐하시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향한 더욱 깊은 영적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침례의 뜻은 물에 잠기다입니다. 즉, 침례 받는 자는 자신의 몸을 물에 잠그고 다시 올라오는 의식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침례에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주님은 자신이 받는 잔은 고난이며 침례는 죽음이심을 의미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일이 바로 주님이 받으실 침례였던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고난당하는 종으로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6-7).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 (사 53:1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의로운 종이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죄인으로 자신을 헤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의 자리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주님의 마음에 대하여 시편 40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7-8). 주님은 침례를 받으러 오시면서 마음에 그 때가 임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성경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며 주의 말씀에 마음에 있나이다.”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드려서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예언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고난과 시련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셨고 십자가의 길을 향한 도전을 즐거움으로 받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신을 이 땅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드러내셨고 앞으로 삼년간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알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셨고 자신을 메시야로 세상에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맡기신 십자가의 사역을 침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주님 안에 사는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의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인 싸움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하는 사역의 헌신을 통해서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 분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 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삶이 하나님의 의를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헌신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가요? 그 사역이 너무나 무거운가요? 그 사역을 감당하느라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있는가요? 우리 주님도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전가 되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섬김은 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 10:38)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입니다. 우리가 의인된 자로서 믿음의 선택이 무엇인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어떠한 잔과 침례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우리의 몸이 준비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이 땅에서 쓰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5,7)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도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드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부르십니다.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함께 동참하며 달려가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사역자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뇨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6-17).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주님 위에 임하시게 됩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하나님께서 주님을 향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며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으로 증거를 주셨습니다. 침례요한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라고 했습니다. 침례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가 죄없는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경외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침례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자신을 종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모습임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침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리는 헌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비둘기같이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역을 하시도록 능력을 부으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시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혼자 사역하신 것이 아니라 삼위 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시는 능력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령, 성자 세 위격을 가지시고 한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고, 아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속에 임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믿는 자의 영속에 거하셔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비둘기같이 임하게 하셨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오셔서 충만케 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기뻐하셨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성령으로 기름부으셔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종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종이셨고 자신의 영혼의 고통과 몸의 희생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만족시켜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으므로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의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0-11).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종으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부르심을 입은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고 종이 되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자신을 주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자신을 주님과 같이 겸손한 종의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종이 되지 않고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한 순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세상에 보이셨고, 하나님은 아들의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자신을 종으로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서 새롭게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강해(3) - 혼돈의 시대에 진리를 찾는 자가 되라 (마 2 장) (0) | 2018.09.15 |
---|---|
마태복음 강해 (4) - 회개가 주는 영적인 유익 (마 3:1-12). (0) | 2018.09.15 |
마태복음 강해(6)- 예수님의 시험에서 배우는 교훈 (마 4:1-11) (0) | 2018.09.15 |
마태복음 강해 (7) -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부르심 (마 4:12-22). (0) | 2018.09.15 |
마태복음 강해 (8) - 팔복(I) (마 5:1-12). (0) | 2018.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