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43) - 물 위로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마 14:22-33)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29-30).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대중들로 하여금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라는 인식을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을 가버나움으로 떠나 보내시면서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인 가버나움으로 가는 상황에 제자들은 큰 바람을 불어 파도가 일어나며 풍랑을 만납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저 200 미터의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헐몬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요단으로 흘러 갈릴리 바다로 유입되고, 그 물이 요단강을 통해서 사해로 흘러가며 이스라엘에게 꼭 필요한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여름철에 부는 서풍은 원만하게 불어 위험하지 않지만, 겨울과 봄에 부는 바람은 동풍으로서 갈릴리 호수 동쪽의 골란 고원에서 가파른 절벽 아래로 바람이 강하게 불어 호수에 강한 풍랑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때가 유월절이 다가오는 봄이기에 동풍의 강한 풍랑이 갈릴리 호수를 위협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던 1세기에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타던 배는 고고학적 발견으로 길이 8.2미터, 폭 2.3미터, 높이 1.2 미터의 크기의 작은 배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이러한 배를 타고 이동도 하고 고기를 잡으며 생업을 유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헤쳐야 했던 제자들과 풍랑위를 걸으신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의 도전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인생은 풍랑을 헤쳐야 하는 도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했지만 뜻하지 않는 바람이 불자 무척이나 고난을 당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마 14:24). 제자들이 바다의 한가운데서 거슬리는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이 괴로이 노를 저었다고 했습니다(막 6:48). 저녁의 어두움 가운데 호수 한 가운데서 풍랑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고난 자체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죄수의 신분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지중해에서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난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랑이 심하게 몰려오자 배는 목적지로 갈 수 없고 오히려 바람에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밤새토록 풍랑과 싸우지만 풍랑이 멈추지 않자 사공들이 배의 기구들을 버렸고 여러 날 동안 바다에 떠나닐 때에 삶의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풍랑이 심하여 오래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배가 멜리데 섬의 근처에서 파도의 물결에 깨어져가자 사람들이 헤엄을 치거나 널조각에 의지하여 겨우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면 배가 파선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릴리 바다를 지나다가 큰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헬라어의 의미는 ‘고문(touture)'입니다. 제자들은 물결로 인하여 노를 젓는 고통이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 더 나아가 영적인 혼돈까지 더해진 복잡한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갈릴리 바다로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이었고, 물결이 세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풍랑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바다의 풍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든지 인생의 풍랑을 만나 고통을 겪게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풍랑으로 인하여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회개하고 다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와같이 불순종하는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회개케 하기 위하여 풍랑을 보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과 같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에 만난 풍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고통을 만나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당황해 하기도 합니다. 욥은 인생의 바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은 고난을 넘어 환경과 육체의 고통으로 인한 고문을 당했던 것입니다.
욥은 여러 달 고난을 당하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욥 7:4-6). 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았지만 인생에 찾아오는 큰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살에는 피부병으로 인하여 구더기가 다니고 흙 조각처럼 살이 터지는 아픔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간 곳이 광야였습니다. 음식과 물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로 그 길을 인도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느낀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시내산에 번개와 구름, 그리고 불 가운데 임재하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자신들을 더 나은 환경으로 인도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그들의 마음을 더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에 갑자기 먹구름이 찾아오고 바람이 불며 풍랑이 일어나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드는 경우는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일부인 것입니다. 풍랑의 위협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은 제자들과 같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2. 풍랑속에 갇힌 우리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신적인 능력으로 제자들이 항로를 이탈하여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6시 사이를 말합니다. 이때 주님은 바다 위를 걸으시며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지르거늘.”(마 14:25-26). 이때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지만 차마 조금전까지 함께 계셨던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유령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셨지만 바다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유령이라고 한 모습은 종종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자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나뉘어 이스라엘 백성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르비딤에서 바위를 지팡이를 칠 때에 물이 흘러 이백만명이나 되는 사람의 갈증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을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음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하루나 이틀이 아닌 일개월 간을 먹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서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1-22)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이백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고기를 한달간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이라도 불가능하다고 대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11:2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카바 바다에서 메추라기를 불러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십 호멜이상을 얻게 하셨습니다. 십호멜은 약 2,300 리터나 되는 양이었습니다. 한 호멜은 230 리터로 한가마 반 정도가 되니까 약 열다섯 가마의 고기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찾아오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필요할 때에 오셔서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첫째, 우리가 방황할 때 주님은 오셔서 길이 되어주십니다. 양이 길을 잃어 방황하면 목자는 양을 찾으러 험한 산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찾으면 어깨에 매고 양의 우리에서 쉬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 방황할 때에 주님이 오셔서 구원자로 보이셨고 방황하는 자의 길로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둘째, 우리가 고통당할 때 주님은 오셔서 힘이 되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물결을 이기지 못하여 고통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위하여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가정에 찾아가셔서 위로와 격려를 주셨고, 그 분의 신적인 권능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셋째,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설 때에 오셔서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풍랑을 만나고 큰 물고기 배에 떨어지자 하나님이 찾아오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요 2:3). 하나님은 풍랑으로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회개케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기에 나귀를 채찍질하며 때립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여시자 하나님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민 22:31). 발람은 자신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발람이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에서 주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통하여 그 분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풍랑 안에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본 제자들은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안심하니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7)고 하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에 제자들은 안심하였습니다. 주님의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주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신 것은 “나는 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생명의 떡이다. 생명이다. 양의 문이다.”라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에서는 풍랑을 잔잔케 하신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7)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의아해 했던 것입니다. 유대의 전통은 오직 하나님만이 바다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시 107:24-25,28-29)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오직 하나님만이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을 보이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실 때는 그 분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사역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며 맹인을 고치시는 기적을 통하여 메시야의 권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남자만 오천명이 되는 군중들 앞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자 사람들은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 우리의 왕이 될 자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에 에언된 메시야라는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조차 주님이 바다위를 걸어오시는 모습에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안심하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의 권능을 시험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마 14:28).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위대한 고백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에 오신 주이심을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때 주님은 베드로를 바다위로 초청하십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 14:29). 베드로는 주님을 의지하여 바다를 걷게 됩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기적은 잠시 바다를 걸은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을 가능하게 한 힘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는 주님이 걸으신 그 바다 위를 걷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도전할 때 주님은 그의 믿음을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믿음으로 도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간 것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갈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겪었던 기적과 같습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 3:8).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발에 닫자 요단의 흘러 내리던 물이 상류에 멈추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물에 닫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바다위를 걷자 그는 주님과 같이 기적의 현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걷는 모습에서 영적인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삶에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 6:33). 순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광야에서 38년간 지체하며 방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아말렉을 물리치고,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그 땅을 얻으며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바다의 풍랑으로 인도하시거나 땅의 광야나 험한 산지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분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은 그분의 때에 기적을 베푸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4. 믿음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증명이 되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곳이었듯이,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께서는 풍랑이나 광야에서 시험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첫 발을 내디뎠지만 그는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으로 바다를 걷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했지만 그는 바람을 보면서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움에 빠지자 즉시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이기에 바다를 헤엄치는 실력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 풍랑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헤어나오려 하지 않고, 다시 한번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베드로의 간절한 외침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주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며 구원하셨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의심을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진 이유는 주님을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였지만 의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 주님은 더 이상 그를 통하여 일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이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보셨기에 기적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적의 현장에서 베드로는 환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큰 방해는 의심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요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책망은 우리를 향한 책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보다 환경을 바라보며 움추러든적이 얼마나 있는지요? 제가 얼마 전에 군산에 호남 친교회에 갔다가 짚라인을 선유도에서 섬겨주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즐겁게 높은 곳에서 짚라인을 타고 내려가는데 저는 갑자기 공포심이 밀려와서 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라면 가겠는데 줄에 의지하여 바다 위를 넘어가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만 높은 곳에서 느껴질 공포심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지만 감정적으로는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동행과 복의 근원임을 이성적인 믿음으로는 알고 있지만, 혹시 감정적으로는 세상이나 환경을 더 의지하지 않는가 우리 자시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믿음의 도전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원망하여 결국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방황하는 광야인지 아니면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정복하며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바다로 미리 보낸 것도 뜻이 었었고, 어두운 방에 풍랑을 보내어 고통받게 하신 것도 주님의 뜻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과 함께 걷는 믿음의 위대한 여정을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사 바람이 그치며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을 경배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33). 배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절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주님께 절한 것은 그 분을 예배한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며 진실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신 성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들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니(I AM)"라는 표현으로 주님의 신성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물위로 걷게 하심으로 그 분의 신성의 능력을 더욱 강하게 보이시자, 제자들은 비로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바라보며 예배했습니다. 배에서 드린 경배는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진정한 예배였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주님은 의심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위대한 삶의 가치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어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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