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44) - 외식을 버리고 마음을 정결케 하라(마 15:1-20)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은 세상의 죄로부터 분리된 상태로서 흠이 없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나라로 세우시기 위하여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들의 풍속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되기 위하여 세상에서 구별되어 거룩한 행실을 보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 있었습니다. 이는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이 있었고, 제사법이나 절기와 같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의식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호 지켜야 할 사회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제사나 정결법과 같은 의식법은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두 성취 되었습니다. 레위기 11-15장은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의식법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지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은 부정한 짐승을 먹거나, 출산하거나 문둥병과 같은 피부병에 걸리거나 몸에서 고름이나 피가 나는 유출병에 걸렸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해지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고립되어 진 밖에서 일정한 기간이 지나 정결해질 때까지 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몸을 물로 씻거나 피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다시 정결해지면 하나님의 공동체와 연합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레위기 11장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여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부정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기에 음식의 구별은 무척이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때에 부정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결단한 것은 레위기 11장이 배경이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행실 뿐이 아니라,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중오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유대 사회의 정결(clean)과 부정의 이슈를 통해서 주님께서 참된 정결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1.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의 전통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시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 15: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율법학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 이어의 기적을 간접적으로 목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기적을 보며 그들이 주목한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생명의 떡으로서 영생의 말씀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2).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고 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후로 약 1400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당하기도 했고 헬라 시대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신 신을 위하여 돼지를 제물로 마치는 신성 모독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성 모독은 유대인들에게 큰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경건 운동이 일어나면서 바리새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한 의도로 율법을 재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장로들의 유전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적용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남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손을 씻는 규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율을 제정했습니다.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으면 그 떡이 부정해지기에 떡을 먹는 사람이 부정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부정해진다는 말씀이 없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식사 전에도 손을 씻어야 하고, 식사 후에도 씨서야 한다는 규례를 만들어 지키도록 했습니다. 손을 씻고자 하면 손을 들어 올려서 손목으로 물이 흐르게 했습니다. 이는 더러워진 손을 물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더러진 손과 접촉된 물을 씻어내기 위하여 두번째는 손을 물이 담긴 그릇에 넣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고자 했던 것은 이방인과 어떤 접촉을 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기에 물에 손을 씻고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방인에게서 산 그릇들은 물에 담근 후에 끊는 물에 넣어 정화시킨 후에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부정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나 죄와 관련된 풍속을 따르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는 미디안의 이방 여인이었고, 다윗의 증조모인 롯도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라합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여리고의 이방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 자체를 부정하다고 여기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행하는 우상 숭배나 간음과 같은 죄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 자체를 부정하다고 여겼고, 자신들의 엄격한 정결의식을 적용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장로들로부터 장로들의 유전으로 도전을 받으셨기에 주님은 그들의 위선을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2. 의식주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세우지 못합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 15:3).
종교는 의식에 초점을 맞춥니다. 종교는 거룩하게 보이는 의식은 있지만 영혼을 살리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에는 사랑이 흘러넘치고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만 있는 종교는 사랑이 없는 정죄만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유대 땅에는 양들을 인도하는 종교인들로 가득했지만, 주님의 눈에 비친 종교인들은 소경을 인도하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 15:14). 생명을 주지 못하는 종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둘다 지옥불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주님은 스스로 경건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구체적인 예를 지적하셨습니다. 십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마 15:4). 부모를 거역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살인죄를 범하는 것과 같아 중범죄로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는 부모를 공경하기 위하여 희생되어야 할 재물을 하나님께 서원했다는 핑계로 노년의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는 빌미로 삼았습니다.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5-6).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을 ‘고르반’이라고 했고, 고르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니까 부모님을 봉양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는 하나님께 일부분만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유전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주신 의도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가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7-8). 많은 유대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외형적으로 유전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을 진실로 공경하는 자는 그 분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모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참된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부모님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본질은 외식이나 의식에 갇혀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가르치거나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의 본질인 예수님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영적인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소경된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끗한 마음으로 세워집니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게 한다고 주장하며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주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마 15:17)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더럽게 하는 부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피해야 할 중요한 신앙 생활의 요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정결과 부정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유대인들의 생각을 바뀌는 새로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간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막 7:18-19).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므로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하셨습니다. 레위기 11장에는 분명히 정결과 부정한 음식을 나뉘이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식물이 깨끗할 수가 있는가요? 이는 구약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필요가 없듯이, 부정과 정결한 음식이 주님 안에서 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정결과 부정한 음식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의미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임을 당하심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교회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정한 음식이 없으며,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의 본질은 죄인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죄가 입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음에서 입과 행실로 나타나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8-20).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더러운 곳은 화장실의 오수가 쌓여있는 오수통입니다. 오수통에는 배설물의 더러운 것이 쌓여있어서 오수통의 뚜껑을 열면 냄새가 가득하고 보기만해도 속이 울렁거립니다. 사람이 오수통에 빠지면 오수독으로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몸에 있는 배설은 매일 몸에서 배출하여 몸을 건강하게 지켜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더러운 죄가 가득한 곳이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너무나 더러워서 입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 이는 십계명의 육계명에서 십계명까지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입니다. 이는 마음의 생각이 입술을 통해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미워함으로 살인하고 음욕을 품음으로 간음과 음란하며, 탐욕을 품어 도적질과 거짓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손을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온갖 죄악을 품어 입으로 나오면 사람이 더러워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움을 피하고 정결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4.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더러운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러운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죄의 옛사람이 죽고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와 함께 죽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새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아난 새생명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의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겔 36:26-27).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새 영이신 성령을 주실 것이며, 새 마음을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구원받은 자는 거듭날 때에 새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행실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로 시작됨을 확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산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마음이 세상의 죄와 더러움에 위하여 더러워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신의 지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교제를 회복하십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서는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아담으로부터 받은 죄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마음입니다.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깨끗하게 할 때에 하나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도전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마음의 죄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외형으로는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며 경건의 모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죄의 더러움이 가득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젲가 없고 사랑의 은혜가 흐르지 않는다면 이는 외식하는 위선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외식주의에 빠지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시며 섬기는 주의 성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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