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42) - 오병이어의 기적(마 14:13-22)

비전의 사람 2019. 12. 17. 19:31

마태복음 강해(42) - 오병이어의 기적(14:13-22)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4:20-21).

 

주님께서는 침례 요한의 죽음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벳세다의 빈 들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14:13). 예수님이 계셨던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가 관할 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안디바의 영지를 떠나 근처의 분봉왕 빌립의 영지인 벳새다라는 곳에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910절에서는 예수님이 벳새다 라는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벳새다는 고기 잡는 집 또는 어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베드로가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1:44). 예수님께서는 뱃새다에서 권능을 많이 베푸셨지만 회개하지 않았기에 저주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뱃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1:21).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 건너편인 벳새다로 가신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6:3-4). 마가복음 6장에서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6:39). 유월절은 414일에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이때는 우기의 마지막 기간이기에 아직 푸른 잔디가 들에 있습니다. 그러나 4월이 지나서 10월 까지는 건기이기에 비가 내리지 않아 들의 풀이 마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도보로 먼저 가게 됩니다.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6:32-33). 주님이 계신 곳으로 여러 고을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주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주님께 찾아온 군중은 남자만 오천명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합하면 최소 만명은 되는 수였습니다. 당시의 가버나움이나 벳새다와 같은 마을의 인구는 약 2000-3000명 정도였지만,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음을 추측해 볼수 있습니다. 그들은 침례요한의 죽음 이후로 자신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랍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누가복음 2장은 예수님이 열두 살 되었을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집으로 가는 여정을 설명합니다(2:41-46). 이때 부모는 하룻길을 지나서야 예수님이 그들의 일행 중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 중심의 사회였기에 절기에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멈추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군중을 이루어 갔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율법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번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서 예배해야 했습니다.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34:23). 그들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가야 하는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수장절 즉 장막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군중들을 위하여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을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14:14).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긍휼(compassion)의 마음으로 사랑과 연민으로 바라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의 필요를 보시고 병을 고치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라고 했습니다. 주님께는 그들이 군중들로 모여 있었지만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안해하며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 침례요한이 악한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장사를 지낸 후에 그들을 영적으로 도와줄 선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을 보자 주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와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영혼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헤롯왕과 같이 정치적인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헤롯은 가장 불안한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위한 요새를 여러 곳에 만들어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삭개오와 같이 물질을 모아 만족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의 영혼은 어둠에서 방황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자 참된 구원을 만나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집착했던 물질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와 같이 세상적인 친구와 쾌락의 만족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주님이 바라본 세상은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필요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넘겨줄 것이며, 그 결과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돌 위에 돌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눈으로 긍휼의 마음을 품고 영혼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은 영혼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4:19).

 

때가 저물자 제자들은 염려하여 주님께 그들을 마을로 돌려보내 음식을 사 먹게 하자고 합니다. “저녁에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4:15). 벳사다는 갈릴리 근처의 마을이었기에 밤이 되기 전에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충분히 음식을 구하거나 사서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4:16).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라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6:5)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질문을 던지자,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더라도 부족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6:7). 빌립의 응답은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계산하는 연약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의 제자의 응답과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보리떡 이십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져옵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때 한 사환이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열하 4:43). 인간적인 눈으로는 보리떡 다섯 개로 백명의 사람이 먹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받았기에 그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열하 4:4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무리가 먹고 오히려 떡이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드레는 주님께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6:9) 라고 했습니다.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지만 이것으로는 모두를 먹이기에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기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과 생선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주님은 안드레가 아이를 통하여 가져온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셔서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적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적은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믿음을 보시고 큰 기적을 일으키시며, 작은 헌신을 보시고 큰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가져온 작은 헌신을 통하여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4:20-21). 주님이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자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주님은 오병 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게 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길을 걸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육적인 필요를 만나와 메추라기로 채워주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8:4).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위해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릍지 않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심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탐욕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감사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듯이, 우리도 항상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니라.”(6:35).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마음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헤롯 안디바나 빌립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왕으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얼마나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6:38-39).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시자 무리들이 가버나움까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주님은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주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6:27). 사람들은 주님이 베푸신 기적을 통하여 육체적인 필요를 채운 것에 감동을 받아 주님을 찾았지만,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40년간 하늘에서 내려 그들의 육적인 필요를 채웠지만,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리는 떡은 영생을 얻게 하기에 영원히 살게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6:48-51).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산 떡이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으면 영생하는 것은 그 떡을 영생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8).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생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은혜를 얻습니다. 육체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적인 필요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으면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고 다시는 고프지 아니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셔서 영적인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참된 의미를 모르고 육적인 필요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게 하시는 주님이 좋아 따라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주고자 하시는 참된 의미에는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시기에 다섯개의 보리떡과 두개의 물고기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무리들은 영적인 것을 보지 못했기에 육적인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영원히 사는 참된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40). 우리는 주님께 나아올 때에 육신의 떡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떡이신 주님을 찾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풍성한 삶의 근원이십니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만일 주님이 육적인 떡의 근원이시라면 육신이 배부르면 그 분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필요를 채워줄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영생의 근원이시며 생명이 풍성하도록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적인 생명이기에 영적인 양식을 얻어야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우리를 살리는 것은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먹고 배불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인 양식이 되도록 날마다 말씀을 읽고 배우며 묵상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