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기록 5원칙

비전의 사람 2012. 8. 2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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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기록의 달인들 ‘기록 5원칙’

목표세워 → 선택하고 → 분류해서 → 정직하게 → 습관적으로

 

 

신기했다. 그들은 서로 거의 모르고 지내는 사이다. 만난 적이 있다 해도 기록 관련 행사에서 한두 번 마주친 게 전부다. 기록과 관련해 공통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록 달인' 4명이 사용하는 방법은 비슷했다. 이들은 기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사안의 가치를 판단해 기록할 필요가 있는 것에만 시간을 할애했다. 고수들의 기록 원칙은 30∼40년 동안 메모와 정리를 반복하면서 얻은 생활의 지혜였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기록의 달인들이 전해준 좋은 기록의 원칙 5가지를 정리해 봤다. 정리를 끝내고 보니 사사 전문작가 유귀훈 씨 같은 '프로 기록 작가'들이 사용하는 기술과 대동소이했다. 다시 한 번 신기했다.


①기록은 습관이다






박정희 할머니가 자신이 쓴 육아일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2쪽을 그리는 데 일주일이 걸릴 정도로 정성을 다한 '작품'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누구보다 기록하는 습관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은 박정희 할머니(89)다. 인천 동구 화평동에 사는 박 할머니는 그동안 손수 만든 그림책 형식의 육아일기로 언론의 주목을 받아 왔다. 1남 4녀의 자식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일곱 살이 될 때까지의 기록을 엮은 육아일기 5권은 지금도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박 할머니는 항상 자기 전에 일기를 썼다. 초등학교(당시 소학교)를 다닐 때부터 들였던 습관이다. 별 쓸모가 없어보였던 일기는 첫째 딸 명애 씨가 여섯 살이던 1951년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명애가 그림책을 사달라고 해서 책방에 갔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 내용, 삽화, 종이 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지. 그래서 그냥 나오는데 딸이 '우리는 돈이 없어? 왜 그림책을 사지 않아?' 하면서 울먹이지 않겠어. 그래서 그날 '너희(당시는 셋째를 낳은 뒤였다) 육아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해버렸지."

말은 했지만 막상 그림책을 만들려고 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과거 자신의 일기장을 펼쳤더니 그야말로 콘텐츠의 보고였다. 명애 씨가 달을 보며 '어머니, 달은 아마 얼음인가 보아요. 이것 보세요. 내 팔도 (달빛을 쪼여서) 산득산득(갑자기 드는 싸늘한 느낌)합니다'라고 멋들어진 시를 지었던 이야기, 둘째 딸 현애 씨의 돌잔치며 셋째 딸 인애 씨가 두 살 때 농약을 마셨다가 죽을 뻔한 일 등등. 박 할머니는 기록하는 습관 덕에 자녀들의 육아일기를 그림책으로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2000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현재 한일관계에 관한 책을 준비하는 전태수 씨(73)는 메모지와 펜을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닌다. 글감이 떠오르면 길을 걷다가도,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도 바로 그 자리에서 적기 위해서다. 이런 습관은 전 씨가 지금까지 쓴 아동도서 20여 권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전 씨는 "모든 기록은 반드시 언젠가는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 기록을 보관했다가 보석으로 만드는 일은 나중 일"이라고 말했다.

②목표를 먼저 세워라

충북 충주시에서 농사를 짓는 임대규 씨(77)는 기록을 하기 전에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배추 고추 옥수수 등 작물의 파종일자, 농약을 뿌린 날짜를 벽걸이 달력에 꼼꼼히 남겼다. 그렇게 조금씩 적어나간 기록은 세월이 지나면서 거대한 '농업 데이터베이스(DB)'가 됐다. 그는 매년 농사를 지을 때 파종 시기와 침수가 심한 토지의 위치와 처리, 농약을 뿌려야 하는 날짜 등의 판단을 DB에 근거해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그의 영농일기 기록은 올해로 33년째가 된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기록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일관성 있는 목표의 존재였다. 임 씨는 2000년 한국국가기록연구원에서 개최한 한국기록문화시민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75)는 1949년, 읽은 책의 제목을 정리해서 같은 책을 또 읽는 시간 낭비를 줄이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갖고 기록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그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 서점에서 책을 꺼내들 때마다 봤던 책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할 정도였다.

이런 불편함을 없애고자 그는 책방 주변에 굴러다니던 전단지를 주워 그 위에 자신이 읽었던 책의 목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기록은 항상 책과 함께하는 학자 생활 동안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책에 관한 기록은 김 교수가 2007년 자신의 인생사 기록을 집대성해 펴낸 '인생백서'의 한 장(章)을 차지했다. 그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나는 '필요는 기록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③무엇을 기록할지 선택하라

목표를 설정했다면 기록할 내용이나 항목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무조건, 모든 것을 기록한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기록자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더군다나 중구난방인 기록은 정리가 어렵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기 쉽다.

고수들은 "기록은 선택의 약속"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말 가치가 있는 것만 기록하거나, 처음에는 넓은 범위의 기록을 해 두었다가 나중에 쓸모없는 것을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런 가치판단은 기록을 하다 보면 저절로 몸에 익혀진다. 본인의 목표와 취향을 명확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④쓰기 전 분류하고, 쓴 다음 꼭 정리하라


기록을 하기 전에 미리 대략적인 뼈대나 분류 체계, 또는 자신만의 기록 양식을 만들어 놓으면 기록 자체나 나중에 하는 정리가 훨씬 쉬워진다. 박 할머니는 육아일기를 만들기 전에 미리 쓸 내용을 정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육아일기를 만들기 전에 예전 일기를 모두 꺼냈다. 그런데 막상 일기를 보니 어떤 내용을 골라서 적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자식에게 줄 선물이니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넣고 싶었지만 집안일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했다. 전쟁 중이라 종이도 귀했다.

고심하던 할머니는 분류 기준을 정했다. 아이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태어난 날, 이름에 담긴 뜻, 함께 지냈던 가족들 이야기'를 넣기로 결정했다. 별도의 인상 깊었던 일은 '한 살 때 두 살 때' 같은 식으로 별도의 섹션을 만들었다. 그제야 기준에 맞춰 의미 있는 자료를 고를 수 있었다. 육아일기를 쓸 때는 다양한 정리방법을 이용해 '부가가치'를 높였다. 먼저 아이들이 볼 책이라는 점을 염두에 뒀다. 가족들의 얼굴,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처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은 그려서 정리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일기는 할머니의 분류와 정리를 거치면서 특별한 기록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⑤기록은 역사다. 정직하게 써라.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가 22일 오전 경기 고양시 한국자치발전연구원 사무실에서 자신의 일생을 담은 '인생백서'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김 명예교수는 "잘못한 것이 있거나 부끄러운 일이 있더라도 항상 정직하게 적어야 한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청탁을 받았어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 기록하고 부끄러워하는 편이 낫다. 거짓말을 하려거든 차라리 기록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기록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정직이라는 것이다.

그의 책에는 1950년 7월 북한 노래를 배우고 인민군에게 편지를 보낸 일, 1966년 3월 25일 처음으로 담배를 피운 일, 2004년 4월 5일에는 '둘째 딸이 부인에게 맞아 눈을 다쳐 병원에 갔다'는 내용까지 그대로 기록돼 있다. 김 교수는 "정직하게 쓰면 건전하고 정직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기록을 통해 오늘 있었던 일을 반성하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좋은 기록의 5원칙

①기록은 습관이다

꾸준함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전''오후 9시'처럼 시간을 정해 기록하는 버릇을 들이면 좋다

②목표를 먼저 세워라

기록을 시작하기 전 목표를 정해야 한다. 명확한 목표는 기록의 효용성을 높이며, 오랜 세월동안 기록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③무엇을 기록할지 선택하라

그날 있었던 일을 모조리 적는 것은 비효울적이다. 마구잡이로 써서는 시간만 낭비할 수 있다. 기록은 선택의 연속이다.

④쓰기 전 분류하고, 쓴 다음 꼭 정리하라

기록을 종류별로 나누어 하면 훨씬 효율적이 된다. 자신만의 기록 양식을 만들어 활용하자. 너무 많으면 혼란스러우니 10가지 미만으로 분류하면 된다. 다 쓴 자료는 날짜별로 쌓아두지 말고 정리하자. 여러 내용이 합쳐져 새로운 무엇이 될 수도 있고, 뜻밖에 의미있는 통계가 나올지도 모른다.

⑤기록은 역사다. 정직하게 써라.

네 명의 달인은 약속이나 한 듯 '정직'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잘못된 기록은 500년 뒤 잘못된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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