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연구(3) - 지혜가 부를 때 응답하라 (잠 1:20-33).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8).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을 듣고 살아갑니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이념에 나뉘어져 자신이 듣고 싶은 정치인의 말만을 듣기도 하고, 국제 정세도 자신들이 선택한 대국의 통수권자의 말만을 듣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지혜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어릴 때부터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아내의 지혜를 잘 들으면 남편이 더 훌륭한 가장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내의 조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수백년간 지혜를 남긴 책들을 읽으며 삶의 지혜를 배우려 노력합니다.
저도 한때는 논어, 탈무드, 손자병법, 데일리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존 맥스웰의 리더십 등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지혜자의 지혜를 배우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오늘 잠언은 지혜가 공개적으로 외치는 설교입니다. 지혜가 우리를 향하여 지혜를 듣고 배워서 어리석은 길에서 떠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지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른다 (20-21)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잠 1:20-21)
잠언은 지혜가 부른다고 합니다. 지혜는 길거리와 광장, 그리고 길 모퉁이,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소리를 발합니다. 이 의미는 지혜는 듣고 배우고자 한다면 어디서든지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지혜를 어디서 배우나요? 저는 뉴스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서 자주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지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곤 합니다. 때로 운전하거나 길에 가면서 간판을 보고도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싹트는 어두움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종종 대화를 합니다.
지혜가 부른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입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삶 자체를 하나님 뜻에 맞게 살아내는 도덕적, 영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에서는 지혜를 의인화 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말하고 부르고 책망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궁극적인 지혜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지혜가 길과 광장에서 부르며 소리를 높인다고 했습니다. 길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선택을 할 대에,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 아닌 곳으로 가면 위험한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길은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길이 아닌 곳으로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지혜의 소리를 듣고 길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소통하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어리석은 자도 있고 지혜로운 자도 만납니다. 이때 우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떠한 지혜를 얻어야 할지를 배울수가 있습니다. 삶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가정이나 사회에서도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훤화하는 길 모퉁이는 시끄러운 거리입니다. 시장과 같이 시끄러운 곳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성문 어귀와 성중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면 삶에서 항상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는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삶을 공유하는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도 항상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들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고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어리석은 자는 지혜의 소리를 듣기 싫어 합니다 (22-25절)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2).
지혜의 탄식은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의 소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라는 탄식은 무지에 대한 분노입니다. 진정으로 지혜의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혜를 거부하는 자느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지만, 지혜는 그것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영적으로 미성숙하여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는 가만을 기뻐합니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과 지혜를 비웃는 자입니다. 거만한 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항상 옳다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미련한 자는 지식을 미워합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입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의 가치와 생각으로 행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지혜는 호소합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어리석은 자는 지혜의 책망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셔서 지혜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한 사람은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을 듣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지혜의 삶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삶은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알게 되는 새로운 삶이 됩니다.
“내가 부를찌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찌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잠 1:24-25). 어리석은 자는 지혜가 불렀지만 듣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며, 도리어 지혜의 교훈을 멸시하며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손을 내민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과 같이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손을 내밀어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지혜의 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롬 10:21).
사람이 멸망하는 이유는 지혜에 대하여 바르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을 줄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알아 최선을 다하여 듣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자 노력하는 삶이 지혜의 길로 걸어가는 자입니다.
3. 지혜를 거절하면 재앙이 찾아오면 도움을 얻지 못한다 (26-31)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6).
지혜는 말합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이것은 지혜가 인간의 고통을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웃다 비웃다는 심판이 확정되었다고 선언하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이 웃음은 고통을 즐기는 웃음이 아니라, 끝까지 붙잡았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잠 1:27). 재앙을 광풍과 폭풍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 큰 눈폭풍으로 많은 교통사고가 나고 전기가 끊어지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값작스럽게 찾아온 눈 폭풍에 노숙자들이 얼어서 죽는 일들도 있고, 경비행기가 이륙하다 추락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광풍과 재앙이 찾아오면 삶의 기초가 무너지게 되고, 그동안 쌓아온 안정이 한순간에 붕괴됩니다. 얼마 전에 태국에 지진이 발생하자 건설주이던 33층 고층 빌딩이 흔들리다가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건물들은 잘 견뎠지만 이 건물이 붕괴된 이유는 부실 건축에 있었습니다. 규정대로 건물을 지어야 했지만, 그들은 규정을 위반함으로 위기에서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공사 주체자들도 같이 무너졌습니다.
재앙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8). 이미 재앙에 빠졌다면 하나님을 불러도 응답하지 않으시고 부지런히 찾아도 만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없신여겼음이라”(잠 1:29-30). 어리석은 자가 재앙과 광풍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거슨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미워하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책망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를 거절한 결과를 삶에서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1).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자신이 심은 것으로 열매를 먹게 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서가 가르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가 꾀더라도 따르지 말고, 지혜가 주는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서 말씀의 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혹시 자신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지혜가 주는 경고음을 무시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경고를 무시하면 결국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4.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초청에 응답합니다. (32-33절)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32-33).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퇴보는 히브리어로는 배반을 의미합니다. 배반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등을 돌리는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다른 길로 가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길로 가는데,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삶의 결말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길을 주장합니다.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킵니다. 미련한 자의 안일은 하나님 없이 느끼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거짓된 안정감입니다. 앞에 떨어지는 폭포를 인지하지 못하고 보트를 다고 유유 자적 누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 살아가는 삶이 현재는 평안해 보이더라도 결국은 자기를 멸망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를 드는 자는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33). 듣는 자는 순종의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을 잘 들으면 결국 재앙을 떠나 평안히 살아가게 합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지키는 생명입니다.
잠언 1장을 마무리하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혜가 부를 때, 너는 어떻게 응답해 왔는가?”입니다. 지혜는 길에서, 광장에서,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계속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지혜를 듣는다면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는 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만과 미련 속에 살아가지만,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부름에 순종함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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