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7) -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전 3:13-22).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6).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는 역할을 함으로 삶의 방향과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양심은 마음의 재판관이 되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흔들리지 않고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가 양심이 주는 소리를 듣고 행동함에 있어서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세상의 가치관과 죄로 인하여 손상을 입게 됨으로 그 기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양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딤전 1: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인하여 청결한 마음을 갖게 되고,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 부패하고, 선한 양심이 더럽혀지고, 믿음에서 변질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한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1:18-29). 바울이 사역을 통하여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교회에서 내보내고 사단에게 내어주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심으로 바울의 사역을 훼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양심을 버리고 옳지 않은 일들을 행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양심을 선하게 지켜야 합니다.
1.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6).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양심이 마음에서 소리를 냅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마음과 몸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로 선택합니다. 인간의 근본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그들은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자신을 숨기려 했는가요? 그들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양심은 우리안에 잠재된 레이다와 같아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마음에서 반응함으로 알려줍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반응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인식된 가치에 따라서 양심이 반응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양심에 대하여 여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선한 양심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1:19). 우리가 지켜야 할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한 양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을 버리게 되면 믿음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해서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 청결한 양심입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3).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그의 청결한 양심을 기억했습니다. 디모데는 순수하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이 신실하게 주님과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삶을 모습에서 청결한 양심을 봅니다. 그는 믿음과 행위에서도 거짓이 없었기에, 그의 원수들이 그희 흠을 잡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잘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정직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에서도 청결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사자굴에도 들어가는 선택을 하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왕이 주는 부정한 음식을 거부하고 채소를 먹기로 선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약한 양심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 8:7). 고린도 교회 성도중에는 우상의 제물인줄 알았지만 먹음으로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졌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지식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영적으로 타협하게 됨으로 양심이 약하여진 것입니다. 약한 양심은 연약하여 쉽게 타협하는 양심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양심은 결국은 양심이 더러워져서 믿음에서 파선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4) 더러운 양심입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딛 1:15). 성경은 하나님을 입술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를 향하여 가증하며 복종치 아니하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반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서 이러한 모습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짐으로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비추도록 하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창문을 통하여 빛이 실내에 비추듯이, 하나님의 진리가 내면의 창인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만일 창이 더러워지면 빛이 비출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전면 유리가 더러워지면 와이퍼로 닦게 됩니다. 창문이 깨끗해야 우리는 앞을 선명하게 보면서 올바르게 운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음의 양심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볼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더러워진 양심의 결과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희들이 하나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음의 양심이 주는 소리를 들었다면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9).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인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욕대로 행함으로 음탕으로 향했고, 어떤 사람들은 동성간의 성관계를 통해서 몸을 더럽히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원인은 양심이 더러워진 결과인 것입니다.
5)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2). 화인 맞았다는 것은 불인두로 지져서 기능이 마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죄가운데 오래 있음으로 인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반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죄를 짓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됨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죄에 깊이 잠기게 되면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함으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자의 모습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6) 악한 양심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2). 악한 양심은 독에 오염되어서 양심의 기능이 왜곡되어진 것입니다. 악한 양심은 악한 것을 용납하고 선한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악한 사람은 죄를 범하는 순간을 즐거워하며 죄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사벨 여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를 탈취하게 됩니다. 악한 양심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아합과 이사벨에게 동일하게 갚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양심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양심이란 선과 약을 분별할 수 있는 내적 증거입니다. 자신의 마음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하는 마음의 재판관인 것입니다. 재판관이 부패하게 되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은 옳지 않은 판단을 내림으로 잘못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와같이 사탄은 우리의 양심을 더럽히려고 하고 악하게 함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화인맞은 양심을 갖게 하려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게 하는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변질시키고 세상의 가치로 변질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성경의 가치와 원리로 인하여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경적인 가치와 양심의 회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경의 가치에 의한 양심을 포기하고 하고 세상의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의 가치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미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도 성경적인 원리를 헌법과 교육에 적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던 나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을 배격하기 시작하였고, 법원에서 십계명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화와 부도덕한 나라로 변질된 지가 오래입니다. 이제는 양심이 화인 맞은 정치 지도자들이 나와서 양심이 주는 소리를 무시하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혼 제도를 외곡하기 시작하였고, 어떤 주에서는 마리화나와 같은 마약도 합법화하고 매춘 등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비양심적인 문화가 영화나 매스컴을 통하여 우리와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주면서 양심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성경의 원리를 철저하게 가르쳐서 그들의 양심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메시지는 살인과 폭력, 음란과 비도덕적인 가치로 우리의 마으을 어둡게 합니다. 물질의 가치가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시되는 가치를 우리는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양심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양심이 성경적인 기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 24:16).
선한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은혜안에 거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습니다. 선한 양심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을 갖기를 애쓰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갖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배우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진리에 기초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양심이 약해져서 쉽게 세상과 타협하는 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조지 바나는 통계를 통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립니다. “거듭난 성인들의 약 14%만이 성경을 도덕적 나침반으로 삼는 동시에, 그 도덕적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는 사람들의 수가 14%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지 바나는 말하기를 입술로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돈과 섹스, 자기 만족의 노예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갤럽과 바나가 우리에게 건네 주는 조사 결과들은 한결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매사에 쾌락을 추구하고 물질주의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성적으로 부정한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의 고백과 현실의 삶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의 고백대로 살아가는지요?
우리가 선한 양심으로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기에 담대하게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선한 양심을 가졌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되며 승리하게 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여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6-17). 요셉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게 되지만, 보디발 아내의 비방이 오히려 수치가 되고 욥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면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은 외적인 시련을 극복하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주님 안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알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셔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베드로전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라는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구별하여 그리스도가 주가 되도록 인정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은 “예수는 주시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라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주시라고 하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에게 주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었고, 다른 어떤 이름도 그 이름보다 높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주라는 이름을 황제나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서머나의 주교였던 폴리캅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음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도시의 관리가 찾아와 가이사가 주시다 라고 고백하고 향을 피우라고 강요하면서, 이렇게 함으로 목숨을 건지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가이사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주는 하나님을 뜻했고, 그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 화형을 당하여 순교했습니다. 그의 순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주는 구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은,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셔서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십니다. 그 분이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용서하시기 위하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는 말씀에서 에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육체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을 의미합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10).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영혼들이 어두움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죽음에 넘기운 자들입니다. 그들의 미래는 영원한 지옥불인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구주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그 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거하십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벧전 3:22).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되는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며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인이 되심으로 우리는 그 분께 온전히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을 지키는 비결은 끊임없이 우리 삶의 주인과 구주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 그 분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신실함의 증거는 결과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한 것입니다. 그는 의의 선포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했지만, 120년 간의 사역을 통하여 그의 가족인 7명만을 구원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노아의 사역을 귀한 사역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특히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우리는 침례의 모형을 보게 됩니다. 노아의 홍수는 사망을 의미하고, 그 후에 홍수가 그치고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온 땅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함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고 했습니다. 이는 방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고 했습니다. 이는 침례를 의미하는데, 침례를 우리의 구원의 상징인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되었다가 부활하는 상징인 것입니다. 침례를 통하여 육체의 더러운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침례를 통하여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헌신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기에 우리의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침례를 통하여 죄로부터의 단절을 결단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을 침례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한 양심으로 섬겨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함을 받았고, 우리의 양심도 깨끗하게 됨으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의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 분을 신실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받아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양심을 살펴야 합니다. 양심이 깨끗하게 됨으로 진실한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며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듯이 우리의 삶과 행위에도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을 통하여 형제를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서도 선한 양심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는 변화될 것입니다. 거짓된 입술과 마음을 버리고,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분의 부르심에 신실함으로 응답하는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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