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17) -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 (마 6:1-8).

비전의 사람 2018. 9. 1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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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17) -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 (6:1-8).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6:1).

 

주님은 산상 수훈을 통해서 위선이 아닌 참된 경건의 모습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경건한 생활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를 의미합니다. 외식은 헬라어로 ποκριτς 입니다. 이는 헬라 시대에는 연기하는 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자였습니다. , 자신의 참된 모습을 감추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참된 인격이나 믿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그가 연기하는 배역을 보고 웃고 우는 연출을 하게 됩니다. 외식하는 자는 자신의 내면의 믿음과 생각을 감추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선자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과 사람 앞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시면서 외식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6). 주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떠나 있는 그들을 향하여 헛되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위선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6:1)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의식해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유혹이 찾아오면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부풀리게 되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는 악한 죄의 길에 들어서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아를 기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보여서 사람의 존중과 칭찬을 받는 것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상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상을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6:1)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상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에서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가 드러내지 않도록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의 예를 통하여 참된 경건의 삶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1. 우리는 구제할 때에 사람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6:1).

 

주님은 구제할 때의 외식에 대하여 지적하셨습니다. 구제 자체는 성경적이며 경건한 삶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참된 경건은 고와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1:27). 스스로 부양할 힘이 없는 고아나 과부, 그리고 장애자들을 돕고 섬기는 것은 내적인 믿음이 삶으로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우리 나라가 전쟁 후에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에 미국의 교회에서 상당한 양의 구제품을 보내주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선교사님들이 주신 옷을 입고 부모님이 미국산 구두를 신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미얀마 선교에 갔을 때에 김연규 선교사님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그 고아원은 호주에 있는 한 성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미얀마의 어려운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이 믿음의 성도의 후원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구제를 경건의 소중한 가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3:27)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구제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제하기 위하여 놓은 함을 구제함이라고 하지 않고 의의 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녀는 과부들을 위해서 속옷과 겉옷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울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도르가를 살려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과부들을 위해서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였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기근이 찾아오자 구제 헌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스스로 부양할 수 없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대외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에게 선교 헌금으로 구제 사역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구제를 하면서 사람에게 보여주고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했던 모습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2-4). 구제는 어려운 사람을 돈과 시간과 재능을 헌신해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희생해서 과부나 고아를 돌아보는 것은 의미있고 존경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불은 나팔은 무엇인가요? 자신이 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나팔부는 한 사람을 고용해서 이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시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이 나팔을 불게 해서 자신의 구제를 알리도록 하는 것이빈다. 주님은 자신의 의를 보여주기 위하여 구제하는 것은 위선적이며 이미 자기 상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이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가 갚으실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욱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큰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람의 영광이 의의 동기였기에 자신의 경건에 대하여 나팔을 불며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 자신이 행하는 구제에 대하여 겸손히 행하며 그것에 대하여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제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구제하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제하는 모습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구제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구제가 은밀히 되는 원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직접 하는 것은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주님보다 사람을 더욱 의지하고 높이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성도님이 구제헌금을 매달 무명으로 지목하셨습니다. 저도 누가 구제헌금을 헌신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전달할 때에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며 교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주의할 점은 구제할 때에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높임을 받게 되고 하나님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6).

 

기도는 경건한 사람의 소중한 영적 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우리의 마음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영적인 삶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홀로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지목하기 전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늘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기도는 소중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전 9,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맞추어 회당과 같은 곳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외출 중에 기도하면 길가에 서서 기도하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순수한 의도가 사라지고 외식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명성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영적이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6:5)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그느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너무나 영적인 사람이라 성전에 도착하기까지 기도를 기다릴 수 없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명성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가는 길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사람들에게 기도의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6).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6:7). 중언부언은 말더듬이를 뜻하며 똑같은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반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에 반복적인 마술적 주문을 하면서 신들을 부르려는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 숭배자들은 하루종일 같은 말로 기도를 합니다.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열상 18:26). 그들은 하루종일 바알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내며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행하는 기도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 앞에서 아데미 숭배자들이 두 시간을 외치며 기도합니다.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하더니.” (19:34). 그들은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는 소리를 두 시간이나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아프리카 부족의 의식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두 세 시간을 같은 말을 반복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발을 점프하며 수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힘이 아닌 악령에 사로잡힌 모습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자신들의 신이 들을 줄 알고 큰 소리와 반복으로 자기 황홀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무슨 기도하는 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영적으로 황홀경에 빠져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자신의 자아를 굴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중보 기도를 통해서 교회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생활과 필요를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분명한 언어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분의 임재 가운데 교제하며 그 분의 영이 충만이 임하는 임재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우리는 금식할 때에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7).

 

금식은 음식을 절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아가는 기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을 위하여 사흘동안 금식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에스더도 사흘동안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며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합니다. 에스더와 유다인들의 금식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하만이 죽고 유다인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금식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금식하셨고,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와 금식은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금식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금식은 물 댄 동산 같이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처럼 은혜가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금식에 대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위선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16).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금식을 보여주려고 자기의 얼굴에 재를 뿌리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금식을 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경건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저희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7) 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재를 뿌리고 머리를 풀어 헤침으로 자기의 영성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금식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서로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면서도 오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주리고 벗은 자에게 식물과 입을 옷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58:8-9).

 

금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경건의 회복에 있습니다.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벗고 굶주린 자에게 양식과 의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며 부르짖을 때에 가까이서 들으시며 도우시는 것입니다. 금식은 믿는 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금식은 오히려 해가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만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자신이 더욱 영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위선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사역이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구제와 봉사, 그리고 기도와 전도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러한 곳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5). 우리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빈다. 우리는 자신의 구제와 봉사가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자신의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금식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금식이며 하나님의 의를 삶에서 회복하는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건을 인정하시고 그 상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