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16) -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비전의 사람 2018. 9. 1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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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16) - 원수를 사랑하라. (5:43-4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4).

 

우리가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중의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본능적으로 화를 내어 분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미의 에쿠아도르에 선교사로 갔던 짐 엘리엇 선교사가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들어가다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총이 있었지만 차마 그들을 향해 총을 쏠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에 짐 엘리엇의 부인과 다른 순교한 선교사들의 가족들이 다시 그 부족에게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을 믿게 했습니다. 남편을 죽인 원수였지만 그들은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할 영혼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선교의 위대한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가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의 감옥에 끌려가 큰 고초를 당했고, 그의 친언니가 그곳에서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녀는 독일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을 고문하고 언니의 목숨을 빼앗아갔던 간수를 만났습니다. 자신이 간증을 한 예배당에서 자신에게 찾아와 악수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지만,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그를 안아 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부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의 위대한 고백은 용서를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4).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지만, 우리의 삶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인 성숙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감정이나 의지를 초월하여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흠정역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이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5:44, 흠정역).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된 흠정역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나누고자 합니다. 원수의 헬라적인 의미는 증오하는 자(hater)입니다. , 우리가 적대감을 갖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이 바로 원수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이 원수가 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의 원수는 적대감을 갖게 하고 증오감을 일으키는 누군가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큰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갑자기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사업상의 관계에서 큰 손실을 입히거나 가족간의 관계에서 용서할 수 없을만큼 깊은 앙금을 갖게 되면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미워하는 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순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증거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며,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을 순종할 수 있을까요?

 

1.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5:44, 흠정역).

 

원수는 친구가 아니 적입니다. 원수는 마음에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증오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가 일어나는데 어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독생자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섬기신 사랑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셨던 분은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한 청년을 손양원 목사님은 가슴으로 용서하게 됩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재선이라는 청년을 살라달라고 탄원합니다.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임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게 됩니다. 그후에 그는 신학교에 갔지만 사람을 죽인 주홍글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다 서울로 상경해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안재선 씨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면, 마치 돌멩이를 삼키는 것처럼 마음이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 청년 앞에서는 항상 나는 네 실수를 벌써 용서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 라고 위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했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기에 그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은혜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너무나 무거운 죄였기에 죄의 사슬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하의 깊은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있는 죄수가 그 지옥과 같은 감옥에서 나올수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어두움의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거운 짐으로 방황하던 우리에게 주님이 오셔서 죄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에게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데, 그 빚을 갚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은혜를 주님께 갚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셔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십자가가 원수된 것을 소멸했다고 증거합니다. “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4-16). 십자가의 능력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원수된 장벽을 무너트리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되었던 관계를 무너트리고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의 능력이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 우리가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단계에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τλειος 로서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성숙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 성숙을 이루어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삶에서 순종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영적 성장의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야 합니다.

“...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5:44, 흠정역).

 

주님은 원수를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축복하는 것은 그 이름을 높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의미는 우리가 번영하고 범사에 잘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때는 평안을 누리고 범사에 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은 온갖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며, 그 믿음의 열매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저주하는 행위는 최고의 모욕을 주거나 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이유없이 미워하거나 흠을 잡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간증을 나타냅니다. 베드로전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9)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악을 행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욕을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의 은혜가 흘러 나오면 우리의 삶에 좋은 날이 찾아온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벧전 3:10).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게 되면 입술로 악한 말을 하면서 죄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욕하며 악을 행함으로 저주하는 자들을 향하여 축복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존경받는 지도자입니다.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인권운동가였습니다. 그는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델라는 억압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백인 간수들이 만델라에게 땅을 파서 누우라고 한 후에 그를 향해 소변을 누면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간수들은 만델라의 자존감을 무너트려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무력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그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악과 분노를 키운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그가 27년간 감옥에 있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 그의 마음에는 분노나 원한이 엇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취임식을 할 때에 자신을 감사하고 모욕했던 교도관들을 취임식에 초청하며 용서와 화해를 실천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위대함은 분노와 원한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하며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6-47). 세리들은 당시에 로마와 헤롯가를 위해서 세금을 수탈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었기에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당시에 세리들은 창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은 그들도 부정하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인식하는 세리나 이방인들도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며, 친구를 존중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선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적어도 그들보다 나은 의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를 미워하거나 모욕하거나 저주하는 자를 향해서도 사랑하며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6:32-33, 35)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나은 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 보다 나은 의의 삶을 실천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원수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 (5:44).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은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은, “do good to them that hate you,” (Mat 5:44 KJV) 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힘들고 삶의 의욕이 떨어집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행동에 의하여 미움을 받는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때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20-21) 라고 했습니다. 원수가 굶주리고 있으면 먹이고 목이 말라하면 물을 주어 마시우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대의 숯불은 그야말로 소중한 자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의 불이 꺼지면 집을 데우거나 음식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불이 꺼지면 숯불을 얻으려고 이웃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소중한 숯불을 나누는 것은 자비의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에 음식을 하도록 하는 불을 제공하고, 추운 밤을 따뜻하게 지낼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원수라도 음식과 물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자비를 얻는 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놓고 링컨을 비난하며 아주 심한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링컨의 얼굴을 고릴라로 비유하며 모욕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스탠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이때도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 스탠턴을 링컨 대통령은 행정부를 조직하면서 원수처럼 대했던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모든 참모들이 스탠턴의 등용에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참모들의 이런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과거 자기를 비난했던 스탠턴의 모든 잘못들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었으며, 자질을 높이 평가해서 국방장관에 임명했던 것입니다. 스탠턴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링컨을 잘 도와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으며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18654, 링컨이 암살을 당했을 때 제일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스탠턴이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6:35)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필요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쓸 것을 빌려주는 것은 하늘에서 큰 상을 얻는 씨앗이 됩니다. 용서하는 사랑은 가장 큰 차원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45)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원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하지 않으시고 해와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해와 비는 인생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환경입니다. 하나님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셔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암흑천지이며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가뭄이 찾아오고 물이 말라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해와 비를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도 내리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베푸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품격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원수를 사랑하는 실천을 가르치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이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치유해 주고 주막으로 데려가 잘 돌보도록 돈까지 지불하고 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죽게 된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며, 더 나아가 유대 사회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원수와도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원수와 같이 대하는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4. 우리는 악의를 품고 핍박하는 자를 기도해야 합니다.

“ ...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5:45, 흠정역).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세상에 속한 자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악의를 품기도 하고 핍박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5:10-12)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면 세상으로부터 오는 크고 작은 핍박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핍박을 만날 때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의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 분을 스데반에게 표출합니다. 그들이 돌을 스데반에게 던져 죽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악의를 품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진 그들을 향해 주님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7:60). 스데반은 자신을 핍박하는 목숨을 빼앗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자녀가 아버지를 닮아가듯이, 믿음의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5-16) 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거룩하듯이,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자비로우셔서 악인과 의인에게 비를 내리시고 태양의 빛을 비추어주시듯이, 우리도 우리를 선대하는 자와 동일하게 핍박하고 모욕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어 먹을것과 마실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의를 품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흠이 없는 완전함에 이르는 영적 성숙의 최고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며 모욕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선대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