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15)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 5:38-42).

비전의 사람 2018. 9. 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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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5:38-4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39).

 

산상 수훈은 주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영적 원리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을 한 단어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이해하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8:29). 생명이 공급하는 피와 양분으로 태의 아기가 자라가며, 엄마가 공급하는 모유로 아기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는 말씀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39).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악한 자들을 만나면서 고통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악한 자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였기에, 사탄의 죄의 흔적이 우리의 육신에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알기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을 받기 전에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사도 바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을 만큼 죄에 물들어 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는 구원받은 바울이었지만 죄와 싸우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에서는 각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을 이해해야 합니다. ,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 죄의 권세에 매여 악한 자의 모습이 나타나는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주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8).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과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생명과 본성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본성은 악한 사탄의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영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으로서 살아있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생을 천국가는 티겟정도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 지식입니다. 생명이란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듯, 영생이란 주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본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3) 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가진 자는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그 분과의 친밀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사탄의 본성인 악함을 생각과 마음에서 버리고, 주님의 마음은 겸손과 온유함을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5-8). 주님의 마음은 겸손한 종의 마음이셨기에 항상 선함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분의 겸손의 마음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고, 고난과 죽음의 길에서도 원망하지 않으시고 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은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에서 나오는 것은 정욕과 미움, 다툼과 혈기가 나와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악한 자로 보이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착한 마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우리가 억울하고 분노하는 상황에서 육체의 혈기와 감정이 드러나면 우리의 모습이 남들 앞에서 악한자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주님의 마음으로 체질화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39).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5:38-39) 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기록된 율법에서는 복수에 대한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21:23-25). 하나님께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복수하는 법을 만든 근본적인 취지는 상해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엄격한 형벌을 정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19:17-18). 율법의 근본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임을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갚지 않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율법의 참된 의미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이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의 배경은 시편 37편을 통하여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371절과 8절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니라 ...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37:1,8) 라고 했습니다. 행악자는 악한 일을 행하거나 꾸미는 자입니다. 불평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חָרָה (하라) 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타다(burn), 분노하다(anger)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마음에 감정이 상하여 분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악자의 행위로 인하여 마음의 감정이 뜨거워지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악한 자가 우리나 가족에게 해를 끼치면 그 감정이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행악하는 자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과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는 것을 성경은 금하고 있습니다. 시편 378절은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분을 품고 격노하며 불평하는 것은 악한 길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악한 자를 만나서 큰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의 반응은 마음에 나쁜 감정이 뜨겁게 일어나고, 그 후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면 악한 자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유혹을 품게 됩니다. 분노는 질투나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분노하게 된 이유가 질투심이었고 질투가 생겨난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경쟁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칭송을 받음으로 자신이나 요나단의 입지가 작아진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악한 자에 대하여 분노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질투심과 경쟁심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큼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라는 분노의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경쟁심이 원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악한 자에게 악함으로 복수하여 경쟁하려는 것은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7:1-2)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풀과 같이 베임을 당하며 푸른 채소가 시듬같이 시들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며 기뻐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공의를 그 분의 때에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시편 37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악에게 순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악한 자가 집에 침입했을 때에 저항하지 말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악한 자가 우리를 해하려고 할 때에 당하고만 있으라는 뜻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관계에서 찾아오는 상처나 어려움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 (24:29) 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악한 자가 나에게 행한 악함대로 나도 악한 자에게 갚겠다고 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네로의 핍박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옥에 갇히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9). 베드로 전서는 우리는 주님과 같이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복이 고난을 통하여 찾아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17-19)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기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21)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에 대하여 원망을 품고 어떤 모양으로 복수하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며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을 베푸는 것이 악을 이기는 성경적인 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5)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히려 선하게 대우함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화를 낸다고 해서 우리가 화를 내어 동일하게 악을 하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이 거짓으로 속인다고 해서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악한 자에게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39).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인 예를 드셨습니다. 주님은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 대하여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행위는 상해를 주는 의도보다는 모욕을 주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당시에 오른편 뺨을 치는 행위는 손등으로 얼굴을 치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모욕하기 위한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맞는 수치를 예로 드셨지만, 삶에서는 말로 당하는 수치도 있고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당하는 수치는 무척이나 마음을 어렵게 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욕을 당하면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갈멜에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마침 나발이 양털 깎는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어 은혜를 얻게 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그 근처에 거할 때에 나발의 양에 손을 댄적도 없고 오히려 다윗의 사람들로 인하여 보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이 베푼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다윗의 사람들을 모욕하고 돌려보내었습니다. 이는 다윗에게 모욕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모욕을 당한 수치심에 욱하고 사람들을 모아 나발을 치러 갔습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의 중재로 다윗이 나발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변화시켰고, 하나님이 오히려 나발을 쳐서 죽게 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복수를 했더라면 그는 살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특권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복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대신 복수하시고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은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 대하여 심한 말을 하며 욕을 주는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용서하는 마음은 주님을 닮아가는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욕하는 자들에 대하여 위협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상황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2-23). 주님이 입을 열지 않으시고 참으시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된다면 이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5:40)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의하여 옷은 부채로 인하여 빼앗지 못하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옷이 그 사람의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22:27-28).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옷은 몸을 가리는 수단일 뿐 아니라, 밤에는 몸을 덮는 이불의 역할도 했기에 저녁이 되면 그 옷을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송사하여 속옷까지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도록 양보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에서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 같이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까지도 내려놓는 삶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마지막 재산인 옷을 빼앗으려는 자는 악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겉옷을 송사하여 빼앗으려 하면 같이 싸우지 말고 겉옷까지 가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이 세상 것에 매여 악인과 다투는 모습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억울함도 많이 있고 상처도 많이 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헤롯 왕이나 빌라도 앞에서 주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생명까지 내려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5:42) 라고 하셨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행위는 당시 유대인들을 정복하고 있던 로마군의 관행을 의미했습니다. 당시에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을 징용하여 군인들의 짐을 규정된 거리까지 운반하도록 했습니다. 그 거리가 약 오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실 때에 로마 군인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운반하도록 했습니다. 이와같이 로마 군인들은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징용을 갑자기 당하게 되면 분노가 생기거나 앙심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여 마음에 분노를 품는 것보다는, 그들의 부당한 요구에도 10리를 더 동행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육신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힘든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자발적으로 더욱 헌신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5:42)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가난하거나 어려운 자에게 사랑을 긍휼히 베푸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어려운 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도록 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2:25). 하나님은 어려운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의 소중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하여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에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의존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의도는 어려운 자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들은 모두가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나 시련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고통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 대하여 복수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좋은 땅을 취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9) 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권리를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구하는 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보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욱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의 창으로 죽이려고 하고 목숨을 찾을 때에, 사울을 향하여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엔게디 광야의 어두운 굴에서 만났을 때에도 그의 생명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악인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께 철저하게 맡기는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37:5-6)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있기에 악한 자를 대적함으로 악의 길로 가는 오류를 피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며 악한 자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쁨으로 섬기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