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4) - 말의 신실함을 지켜라. (마 5:33-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마 5:37).
주님은 올바른 맹세와 약속에 대하여 산상수훈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3). 주님께서는 그들이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주님께 지키라는 것을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축약한 것입니다.
맹세란 맹세하는 자의 진실함을 변하지 않는 권세의 심판 아래 건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신실하며 약속한 바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서역입니다. 또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행하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구약에는 맹세를 대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삿 8:19). 이렇듯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고 하는 맹세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며,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맹세를 어기는 것은 죄가 되었습니다.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레위기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2)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짓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서원한 것을 다 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 30:2).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과 서약을 깨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맹세나 서약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하는 부채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서원해서 복을 누린 사람이 있지만, 함부로 맹세함으로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음으로 인하여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11).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함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자 때가 되었을 때에 성전에 가서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서 성전에서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 1:28). 한나의 믿음으로 아이는 위대한 사무엘 선지자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사사기에는 입다가 사사로 소개됩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하게 됩니다. 그의 서원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처음 자신을 맞으러 오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 12:31). 입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그의 딸이 춤을 추며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입다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삿 11:35). 입다는 자신이 맹세로 인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딸을 번제로 요구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제물을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입다는 이방 민족의 풍속을 따랐던 것이고, 자신의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했기에 지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입다가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서원의 동기에 대해서는 성경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즉흥적인 맹세였고 자신이 기생 아들로서 자라고 배척당한 것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게 되는 아픔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맹세와 서약은 종종 맺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서약으로 인하여 큰 재앙을 당하기도 하고, 거짓 맹세로 인하여 신뢰를 잃기도 합니다. 주님은 율법에서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맹세와 서약이 당시에 남용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바른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맹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1. 우리는 자신의 말을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4-35).
주님께서는 맹세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마 5:34)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의도하신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야바 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 (마 26:63-64)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할 때에 ‘네가 말하였느니라.’ 고 답변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 (롬 1:9)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코 로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갈 1:20) 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코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적용한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 6:13). 신명기에서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변개하여 새로운 법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시는 주로서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맹세의 관습이 시간이 흘러 변질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 대신에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이나 제단과 같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의 이름으로 맹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진정으로 약속을 지킬 의도가 없거나 거짓된 맹세를 하면서 죄를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자신들의 거짓을 숨기고 하나님을 향한 죄를 피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쉽게 범하는 습관적이고 위선적인 맹세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진실된 맹세가 유대인들의 거짓된 속임수의 도구로 전락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맹세를 상대를 속이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사고가 팽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맹세에는 하나님 이외의 대체를 찾아 맹세하고 그러한 맹세를 소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피하는 대신에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과 머리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셨기에 책망하시며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늘로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4).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하늘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로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공간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인 하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기에 그 약속을 소홀히 하는 모습에 대하여 질책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땅으로도 맹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땅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기에 그 성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로도 말라고 하신 것은 머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은 그 머리의 숫자까지 세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희거나 검게 할 수가 없는데, 머리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진실된 맹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로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맹세는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맹세에는 하나님을 향한 서원이 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속이 있습니다. 입다가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딸을 번제로 드렸듯이,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 바리새인들은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생명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맹세를 지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이나 머리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말이 곧 약속이 되어야 하며 신실하게 지켜져야 함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은 지켜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들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 15:4). 우리는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함 없이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약속도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신뢰가 되어야 하며 그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서약을 해야 합니다.
오래전에 국민일보에 소개된 링컨 대통령에 대한 기사입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마차를 타고 켄터키주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육군 대령이 대통령에게 얼음을 탄 위스키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대령,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대령은 잠시 후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대통령에게 권했습니다. 링컨은 대령에게 거듭 사양의 뜻을 전한 후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나를 침대 곁에 앉혀놓고 말씀하셨소.`에이브야,이제 나는 회복이 불가능하단다. 죽기 전에 한가지 약속을 해야겠다.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겠니?' “그날 나는 어머니께 약속했다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약속을 지켜왔소. 이것이 바로 술과 담배를 거절하는 이유라오.” 대령은 링컨에게 머리를 숙여 존경의 뜻을 표했습니다. 링컨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아홉살 때에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술과 담배를 거절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약속한 것을 온갖 핑계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를 힘써 지켜야 합니다.
2. 우리는 자신의 말에 신뢰성을 보여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마 5:37).
우리가 자신의 말에 대하여 신뢰성을 보이게 되면 듣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거나 자신의 말에 신뢰를 더하기 위하여 다른 것에 맹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였다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킬 의도가 있지만, 우리의 힘과 지혜가 부족하기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며 맹세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고보서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약 5:12)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주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맹세하지 말고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맹세하였다가 지키지 못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다면 지켜야 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 신뢰가 있다면 우리는 단지 ‘옳다 아니다’ 라고 말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거나, 하늘이나 땅이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다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말에 신뢰를 주기 위하여 맹세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순수한 의도가 아닌 잘못된 동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에 대하여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떠한 말을 해도 믿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어떠한 말을 해도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자산은 신뢰성입니다. 신뢰를 가진 자는 어떠한 일을 해도 그 신뢰를 가지고 명예를 얻거나 부를 얻기도 합니다. 신뢰는 약속에 대한 이행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카드 사용에 대하여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신뢰입니다. 그러나, 매달 카드 내역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은행으로 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여 신용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이와같이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미국은 신뢰 사회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신용도가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아무리 현금이 많이 있어도 신용도가 없으면 은행이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신용도를 높이도록 합니다. 자신이 사용한 내역에 대하여 늦지 않고 납부를 하게 되면 졸업하고 나서 차량을 구입하거나 집을 매입할 때에 신용도에 따라서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사고 나서 신용 수표에 사인을 해서 사용합니다. 자신의 은행 잔고를 비교하면서 사용하도록 배우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행 잔고보다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 신용이 떨어지게 되고 그 다음에는 은행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는 신뢰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뢰를 보이는 것이 매일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주님은 그 분의 약속을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어떠한 댓가를 지불하시더라도 성취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고, 그 분의 약속대로 교회는 세워졌고 주님은 지금도 믿는 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계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주님의 약속대로 교회는 주님의 반석위에 세워졌고, 그 교회는 사탄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강력한 주님의 몸으로서 세워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아셨지만 그 분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셨고 약속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영원한 평안을 천국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주셨고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교회에 강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3)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분의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영접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신 후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주님계신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영원한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복음을 거절한 자는 영원한 지옥 불에서 고통당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신실하심과 같이 우리도 말에 있어서 신실하여 최선을 다하여 지키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에 신실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함으로 신뢰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여서, 더딜찌라도 지체되지 않고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결코 거짓되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의 말과 행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자신의 말과 행실을 바르게 하고 진실되어 신뢰를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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