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2) - 노하지 말라 (마 5:21-2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예수님이 살아가는 시대는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대제사장은 부패하여 성전에서 막대한 부를 착취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 버렸습니다. 로마의 군대는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었고, 헤롯왕은 백성들을 포학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헤롯 아켈라우스는 성전에서 데모하는 3,000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장군인 바루스는 2,000 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형제에게 분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분노가 가득한 시대에 형제를 향하여 이유 없이 노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분노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지듯이 감정도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분노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분노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여러 모양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 19:11) 라고 했습니다. 이는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지혜로움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6) 라고 했습니다. 이는 분을 내더라도 그 분노로 인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화가 나서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표출함으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지만, 모세는 화가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게 됩니다. “...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0-11).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약 1:20)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모여 회의를 하다가 감정이 좋아지지 않아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결정을 내리더라도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거십니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분노를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은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분노에 대한 관계는 밀접하며, 분노의 성경적인 관점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을 통해서 형제에게 분노하지 않고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분노에 대한 영적인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형제에게 이유없이 분내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주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1)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찌니라.” (출 20:13).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출 21:12)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심판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를 의미하는데, 범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23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였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살인을 하게 되면 마음의 23 명의 위원의 사법 위원으로부터 재판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마을의 입구에 이러한 재판장이 있었고, 23 명의 위원들은 살인자를 재판한 후에 정죄하고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살인한 자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게되면 그 사람도 율법에 따라서 돌 팔매질의 형벌로 죽임을 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위의 문제로 접근했지만, 주님은 율법의 문제를 마음과 생각의 관점에서 접근하시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계명의 육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진정한 영적인 의미를 다음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1. 급하게 분노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참된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인하면 마을에 있는 23 명의 회원들에게 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해지는 상황을 말씀하시면서, 율법에서 언급한 살인의 영적 의미는 마음의 분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흠정역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유없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는 말씀이 포함되었습니다. 즉, 형제에게 이유없이 분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는 자연적인 감정이고 분노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유없이 분노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분노함으로 죄를 짓는 경우는 언제인가요? 첫째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경우입니다. 특히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거나 약한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함부로 화를 내면서 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을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유 없이 분노하는 경우는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표출되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부정적이며 죄가 뿌리가 되는 감정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거나 복수하려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분노가 정당시 되는 경우는, 우리가 화를 냄으로 인하여 잘못한 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할 때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감정을 상하게 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는 보복의 의미가 있다면 ‘살인하지 말지니라.’ 라는 계명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을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유없이 분노하는 것은 살인과 같은 행위에 첫 발을 내디뎠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노에서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는 것은 이미 살인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요일 3:15). 요한일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유대 사회에서 살인한 자는 마을에 23 명의 위원회로 구성된 소 재판정에서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주님은 형제에게 이유없이 분노하는 자는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 형제를 경멸하는 언어는 살인과 같습니다.
주님은 마음의 살인에 이어 경멸의 말을 사용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과 같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주님은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을 향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o fool and slow of heart)’ (눅 24:25)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자, 너희들은 미련하구나 그래서 마음에 믿음을 갖지 못하는 구나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분과 악의를 가지고 형제에 대하여 악하고 비난하는 말을 하는 것은 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라가는 교만에서 나오는 조롱의 말입니다. 라가는 원어로 보면 ‘돌대가리’ 라는 뜻입니다. 이는 돌대가리와 같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인격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욕이었습니다. 마음에 교만한 자는 형제를 무시하며 멍청한 돌대가리로 인격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향하여, 잠언 기자는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잠 21:24) 라고 했습니다. 즉, 교만히 행하는 자가 바로 망령된 자인 것입니다. 주님은 형제를 라가라 즉, 멍청한 돌대가리라고 모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71 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최고의 사법 의결기구였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이유없이 화를 내는 자는 지방의 사법 기관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며 조롱하는 말을 하면 공회에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미움에서 나오는 경멸의 단어입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경멸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즉, 형제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미련한 놈이라고 했을 때는 그의 인격에 큰 상처를 주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지옥불은 헬라어로 게헨나입니다. 이는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옥불은 헬라어로 게헨나로서 게힌놈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가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므낫세와 악한 왕들에 의하여 자녀들을 몰록우상에게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던 곳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이 영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더럽게 하여 몰록에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열하 23:10). 므낫세 왕의 시대에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린 아이를 불에 태워서 몰록 신에게 인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습니다. 몰록 신 주위에는 사람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아이의 고통속에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였던 것입니다. 몰록 신 안에서 불을 지피면 청동으로 된 우상이 뜨거워지고, 몰렉 신의 양 손에 아기를 올려두면 뜨거운 곳에서 아기가 죽어 갔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이러한 악한 아기 제사를 하지 못하도록 그곳을 더럽게 하였습니다. 그곳에 쓰레기를 가져다 태우게 하고 짐승의 사체나 심지어는 사람의 사체도 그곳에서 태우게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오물과 쓰레기가 태우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힌놈의 골짜기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있으며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영원히 타는 불못이란 의미의 게헨나라는 말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지옥 불 즉 게헨나 라고 하면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의 불타는 곳으로 연상을 했던 것입니다. 즉,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며 무시하는 말을 하면 게헨나 즉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살인한다는 의미는 단지 생명을 빼앗은 것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이는 사람을 향하여 분노하거나 그 사람의 인격을 조롱하는 언어인 라가라 하거나, 그 사람의 신앙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되며, 형제를 라가라 하며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공회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어리석은 놈이라 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옥의 자식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재판의 강도에 따라서 분노의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세 개의 사형 제도가 있었습니다. 목베임을 당하는 형벌이 있었고, 산헤드린에 의하여 돌에 의한 투석형이 있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불에 태우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노하며 형제에 대하여 거만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죄에 해당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분노에서 입으로 내뱉는 말의 심각성에 따라서 그 죄의 무게가 크고 그 형벌의 중함을 경고하셨습니다.
2. 우리는 형제와의 사랑과 화평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 그리고 직장의 사람들과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로 화평을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며 평안을 지켜가야 합니다. 만일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와의 관계에 금이 간다면, 우리는 관계 회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해야 하며, 자신을 형제에게 겸손한 태도로 보이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배상을 함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형제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는 비결을 가르치셨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 나오기 전에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소중한 예배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정결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먼저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물을 드리며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시는 만큼, 우리가 형제들과의 화평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죄가 있다면 먼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고전 11:28). 이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는 자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입혔다면, 그 형제에게 먼저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유없이 분노하고 상처를 주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이라면,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목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군가에게 이유없이 분노를 하여 상처를 주었다면 예물을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에서 누군가로부터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서 참여하는 것은 예배에 합당하지 않은 옷을 입고 참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미움과 증오, 탐욕과 같은 죄를 회개하고 정결한 마음을 갖는 기회로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순결함을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에 화해해야 합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5).
고대에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갚을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고, 채권자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누군가와 송사에 걸려서 재판관에 서게 될 위기에 처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법정에 가는 길에서라도 급하게 화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해할 기회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재판을 받게 되고, 재판관은 법에 따라 관원에게 내어주고 관원은 옥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옥에 간다면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다 갚기 전에는 결코 나올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재판에서도 상대방과의 민사에서는 재판에 이르기전에 서로 양보하여 화해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때 잘못을 한 자는 피해자에게 합당한 물질적인 보상을 하고 그 댓가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판관은 서로의 합의를 존중하고 구속을 하지 않는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가해자이면서 아무런 합의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재판에 서게되면 그는 법의 잣대로 판결을 받아 구속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노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숨겨진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길에 있는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송사하는 자인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죄의 대가를 지불할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타는 지옥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의 대가를 갚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의 심판을 받아 고통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의 때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하여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2“56-59). 주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을 분별하듯이 이 시대를 분별하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고소하는 자가 그를 재판장에게 끌어가서 재판장이 그를 옥에 가두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감옥에 갇히게 되면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결단코 나올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를 송사하시는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지옥에 갇혀 나올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구원받을수 없고 영원히 뜨거운 불에서 고통당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길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4-25)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구속은 값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노예들이 시장에 나오면 주인이 와서 값을 치루고 노예를 사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집에 데려가 노예로 삼을수도 있고 자신이 값을 주고 산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유하는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형벌의 대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심판의 날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은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죄에 대한 모든 빚을 청산하기에 더 이상 옥에 갇힐 필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옥에 갇히게 되면 그 값을 치루기까지 결코 나올수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영원히 고통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치루는 값은 이 세상의 살아있는 영혼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형제에게 분내지 말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배웠습니다. 살인하는 자가 심판을 받듯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살인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라가라 하며 교만한 마음으로 형제를 경멸하는 언어를 하는 자도 공회의 심판을 받게 되며, 어리석은 놈이라 하며 증오의 언어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존중함으로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행실로 피해를 주었다면 보상을 해주면서 화해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면 물론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재판정에 가는 경우라면 가는 길에 화해함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보혈을 의지함으로 용서받는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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