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3) - 인간관계의 황금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오늘의 본문을 ‘인간 관계의 황금률’ 이라고 합니다. 황금률이라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 제국의 24대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더가 이 글귀를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것에 유래했다고 합니다. 유대교의 랍비였던 힐렐은 토라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힐렐은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타인에게도 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으로 율법의 핵심을 정의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최고의 계명이며, 다음으로는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대우를 받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을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존중하며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사람이기에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살아가며 존중을 받기도 하고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인격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을 경외하며 영광을 돌리는 자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모욕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자를 멸시하고 성전에서 함부로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기라.” (삼상 2:30) 라고 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였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상재를 존중하면 존중을 받지만,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수치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우리는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마 7:1-2).
비판은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인 판단을 받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면 부정적인 관점에서 비판이나 정죄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지식이나 교리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않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 는 새 계명을 주셨기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서로에 대한 판단이나 비판은 사라져야 합니다.
민수기 16장에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비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하시는데 스스로 높이느냐 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비난하자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들이 모세를 비난하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하나님의 비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땅이 갈라지고 고라의 자손들이 산채로 음부에 빠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과 비판 받기를 원치 않는만큼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롬 14:3).
사람은 자칫하면 영적인 우월감으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길 수가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으로 세워졌습니다. 서로 간의 갈등의 원인은 음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함으로 모든 음식을 먹는 자는 음식을 구별하여 먹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기에 그들의 믿음의 양심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은 모욕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모욕하는 행동은 너무나 주님에게 치욕적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모욕합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27:28-31).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모욕하는 행동은 권력에 의한 횡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상대를 모욕하거나 업신 여기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업신여기는 태도는 교만에서 나오는 죄악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우리가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푼 것은 주님께 사랑을 베푼 것이지만, 작은 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함부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3) 우리는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 (잠 24:29).
잠언 기자는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 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대로 갚는 것은 복수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한 마음때문에 상대에게도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자신이 손해를 보았기에 상대에게도 손해를 보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논리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어떠한 허물이나 죄라도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은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전하는 사랑의 한계를 넓혀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9)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여 같이 육신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주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상해를 입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사장이 지나가지만 그냥 피하여 지나가고 다른 레위인도 그냥 피하여 지나갑니다. 이때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만나 불쌍히 여겨 그를 도와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보살펴 줍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둘을 주면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어가는 자를 보살펴 줄수 있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언급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게 여겨 그 동네로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즉, 사마리아 사람과 상관하는 자체가 부정이 타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오히려 제사자이나 레위인보다 더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편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아마도 거반 죽게 된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대로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습에서 복수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대접 받고 싶은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로마 황제인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은 서로를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하여 가치를 부여하고 세워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가치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2:10).
우리는 서로를 향한 존경심을 가져야 합니다. 존경은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존중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 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을 드리기 위하여 찬양으로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중한 물질을 드려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존중해 드리며, 사회에서 지위가 높으신 분들을 합당한 예우로 존중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간의 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예우하며 자신을 낮추어 대하게 됩니다. 빌립보서는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하며 자신보다 낫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낮은 마음을 늘 간직하고자 애쓰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저는 미국에서 제임스 프라이스 (Dr. James Price) 교수님의 존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90 이 넘으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당시에 제가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어려워 하고 있을 때에 저를 존중하면서 언어나 글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대화하며 잘 지도해 주셨습니다. 저희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도 대접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것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의 격려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고 학자로서 높은 실력으로 저를 무시하거나 빈정대지 않고 잘 지도해 주신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 이것인 학자의 진정한 인격이라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존귀한 사람이나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에게 존귀한 자로 대우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중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과 존중이 우리에게 배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사랑을 주거나 받을 때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큰 행복을 얻게 되며 자존감도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삶이 지치고 낙심과 절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필요를 동시에 주셨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기도 하지만, 부모는 사랑을 주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는 끈끈한 사랑의 유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같이 사랑의 유대감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고,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지체들이나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등불이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즉, 죄가 많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셨기에 이제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를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도말 (מָחָה)’ 의 의미는 ‘씻어내다 (wipe out) 또는 ‘기억으로부터 흔적을 없애다(blot out).’입니다. 도말의 히브리적 단어는 ‘그가 지워 없애 버렸다.’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고 기억조차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하’ 라는 도말은 구약 시대에 글을 동물의 가죽인 양피지 위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글씨를 쓰다가 얼룩이 묻거나 틀리게 미세한 얼룩은 스펀지로 흡수하여 깨끗하게 하였으나, 큰 얼룩은 가죽 전체를 물로 씻어내거나 문질러서 닦아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원래대로 깨끗게 만드는 것이 ‘마하’ 란 단어의 기본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로 사용되어진 도말은 지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출 32:32). 즉, 도말한다는 것은 씻어서 없애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어 주셔서 다시 백성으로 받아 주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완전히 씻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사라지듯이 우리의 죄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흔적도 없이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도말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를 기억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흔적을 지우고 기억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흔적을 지우셨듯이, 우리도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비방을 하고 개인적으로 모욕을 준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워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면 이제 지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원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는 주님을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행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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