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21) - 판단하지 말라. (마 7:1-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2).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비판은 영어로는 judge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재판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κρίνω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다른 사람의 행실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비판하지 말라고 번역을 했지만, 원래의 의미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하여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여 비판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도 바리새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조롱을 당하시기도 하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임까지도 당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주님의 제자들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 고 하신 의미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전혀 ‘분별하지 말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나 잘못된 교리에 대하여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 내의 영적인 순결성과 질서에 대하여도 깨어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판단이 공평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공의는 공평하게 대우하시며 긍휼과 자비로 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치우쳐서 선입견을 갖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편견을 갖게 되면서 그 판단 자체가 공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보다는 판단하지 않는 것이 우리와 지체에게 더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잘못된 판단은 정죄와 모욕과 같은 죄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공평하고 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탈무드에서는 공평하게 판단하는 것을 아픈 자를 돌아보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만큼 소중한 영적인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평하게 판단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한 유대인이 지인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지 못하여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며 부정적인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이때 친구들이 모여서 상처를 준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많은 사람을 초청할 수 있는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에 이해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마도 그 사람이 이미 초청장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실수한 것입니다.” 라고 언급하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처받은 사람의 부정적인 시간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서로를 향하여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에 숨어있는 동기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거나 나쁘게 볼수 있는 선택을 갖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판단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1. 우리는 비판하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1).
주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우리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고 비판함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위기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9:18)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가치를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 욕하거나 험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 아파하며 회개하는 일에 대하여 인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는 너무나 쉽고 빨리 판단하고 비판하거나 정죄로 이어집니다.
법의 재판에서도 한 사건을 두고 오랜 기간 동안 변론하며 재판하는 것은 공평한 판결을 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에 치우쳐 너무나 쉽게 판단한 후에 비판하거나 모욕하는 언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몸과 같다.’ 라는 인식을 하면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이나 정죄를 멈추게 될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6-38).
주님은 우리가 가급적 판단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이 자비에 근거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결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만큼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주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배려한 만큼 그 배려를 하나님으로부터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하지만, 그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약 4:11)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형제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형제를 정죄하는 자는 자신도 정죄를 받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말이 마치 법인 것처럼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판단하게 되면 그의 허물을 보고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재판자로서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4장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급하게 판단하여 형제를 업신여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시기심이나 죄의 속성에서 나오는 결과로 형제에 대하여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거친 말로 인하여 형제가 감당하지 어려울 정도로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에 복수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형제를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2. 우리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2-3).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되면, 우리는 더 큰 판단과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 판단과 정죄는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에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창 16:12). 이스마엘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게 되는데, 또한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슬림들이 평화의 종교라고 하지만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그들 안에는 복수의 영이 가득합니다. 오늘날 내전이나 테러의 근원지가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는 나라들입니다. 시리아의 내전은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예멘의 내전은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갔고 전 세계로 난민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나라들 간의 전쟁도 대부분의 미움과 복수로 시작됨을 보게 됩니다. 그 결과는 재난이 자신들에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푸면 그 은혜가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 결과로 자신이 판단받고 정죄를 받는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만큼 배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모질게 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모질게 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질게 대하셔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랑으로 대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큰 허물을 먼저 발견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관대하지며 비판을 절제하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안에 있는 큰 허물을 먼저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작은 허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다 보면 작은 허물이 쉽게 보이곤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판단하고 훈계를 하고자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을 살피며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같은 허물이 있거나 더 큰 허물이나 부족함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 안에 있는 허물을 들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들보와 같은 허물을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를 가진 자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책망을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그 결과는 우리의 훈계는 상대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게 합니다. 눈에 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훈계하는 자의 눈 속에 있는 큰 들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당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허물을 책망했다가 더 큰 수치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의 작은 잘못을 가지고 판단하고 다투는 사람은 자신의 더 큰 허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는 작게 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한 국회의원이 ‘음주운전은 살인이다’ 라고 주장했던 분이었는데, 자신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숙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더 큰 허물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들보와 같이 큰 허물을 가지고 있는 줄을 안다면, 감히 형제의 작은 허물을 보면서 판단하며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고 업신여기기 전에 자신에게 있는 들보를 보고 빼어내야 합니다. 주님은 “보라 네 눈 속에 있는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4-5)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보고 판단하는 자는 오히려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더 큰 허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책망하는 모습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씻지 않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비방하고, 주님이 안식일에 환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비방하는 것을 어리석게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눈에 들보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제자들의 티끌을 보며 판단하며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신 바리새인들은 위선적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악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자신이 범하는 죄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비판적이고 판단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는 누구인가요? 그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는 가혹할 정도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는 너그러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들보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티끌만을 보면서 비난을 일삼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기 전에 자신의 허물을 더 크게 볼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본 후에는 들보를 빼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허물을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의 은혜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권위를 주셔서 다른 사람을 훈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들보를 뺀 자가 다른 사람을 훈계함으로 티를 제거하도록 도와 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3. 우리는 준비된 자에게 훈계를 주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밝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 7:6).
우리가 자신의 들보를 빼어낸 후에 흠이 없는 자로 세워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티를 뺄 수 있는 영적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권면하거나 훈계하는 과정에서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분별력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개나 돼지는 거룩한 것이나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에 발로 밝게 되고 더 나아가 거룩한 것을 준 자를 찢어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영적인 교훈과 말씀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올바른 교훈과 책망은 소중한 진주와 같이 소중합니다. 잠언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잠 25:11-12) 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이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겸손하게 청종하는 자에게는 금고리와 정금 장식과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잠언서 3장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 3:18) 라고 했습니다. 겸손히 책망을 받는 자는 지혜를 얻은 자이며 그 지혜는 생명 나무가 되어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눈에 비친 개나 돼지는 누구인가요? 그들은 책망을 들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책망하는 자를 공격하여 발로 밟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거룩한 것이나 진주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교훈은 겸손하여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된 자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다윗이 나단으로부터 책망을 받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였고 성령의 임재와 구원의 기쁨을 간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눈에 개나 돼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용서를 얻고 은혜를 입은 것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마음으로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시드기야 왕과 방백들이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잡아 때리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없이함으로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좋은 말만을 하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개와 돼지같이 거룩한 것과 진주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적인 교훈으로 책망하여 티를 빼내려고 한다면, 분별력을 가지고 그 말씀을 받을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는 지혜를 얻어 더욱 지혜롭게 될 것이며 교훈을 얻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발견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공평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본성 자체가 공의롭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자신 안에 있는 들보와 같은 허물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올바른 교훈을 줄 때에는 그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로운 자의 삶이 변화가 일어나며 더욱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강해 (23) - 인간관계의 황금률 (0) | 2019.02.16 |
---|---|
마태복음 강해 (22) - 하나님의 응답을 얻는 기도 (마 7:7-11). (0) | 2019.02.16 |
마태복음 강해 (20) -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0) | 2018.10.06 |
마태복음 강해 (19) -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 (마 6:19-24). (0) | 2018.09.29 |
마태복음 강해 (18) -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0) | 2018.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