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40) - 불신앙의 장벽을 넘어라. (마 13:5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 13:58).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주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지만, 불신앙이 가져오는 장벽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자라신 곳은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후에 모세의 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루시기 위하여 40일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눅 2:22). 레위기 12장은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삼십 삼일이 지나서 정결케 하는 기간이 차면 번제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쌍을 취하여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야 함을 가르칩니다(레 12:2-6). 그러나, 경제적인 힘에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집비둘기 둘을 가져다가 번제와 속죄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대로 비둘기 한 쌍으로 예루살렘에 나아가 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거하던 마리아와 예수님에게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오는 계기로 헤롯의 위협으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가셔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게 됩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19 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전하시며 메시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리고, 회당에 있던 자들이 예수님을 절벽이 있는 산에 가서 예수님을 절벽으로 밀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저희 가운데서 나오시고 갈릴리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약 일년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가르치신 후에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랍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마 13:54).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지혜와 권능에 크게 놀랍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알고 그의 모친과 형제들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 (마 13:55-56). 나사렛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형제인 야고보, 요셉, 시몬과 유다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 후에 낳은 자녀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 중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부활을 목격한 후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들이 배척하는 모습을 보시고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 14:57)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믿지 않음을 인하여 나사렛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 14:58).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립니다.
오늘 우리는 불신앙이 가져오는 결과를 나누면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기를 소망합니다.
1.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합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 13:57).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요구하신 것이 순종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5-17).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가꾸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믿음은 곧 신뢰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탄이 주는 말을 더욱 신뢰하여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은 동기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불순종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합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는 모세가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로 보내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바로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라고 하며 모세의 말을 거절합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애굽에 10 가지 재앙이 내리고 마지막은 사람과 짐승의 장자가 죽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강팎한 마음은 홍해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하다가 그의 군대와 전차가 바다에 수장되는 처절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민수기 1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의 거민을 보고 두려워하며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27-28).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도전하면 하나님은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들의 반응은 길가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습니다. 주님이 권능과 말씀으로 사역하신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주님은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고라신과 벳새다였고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마 11:23). 가버나움과 고라신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한 결과는 지옥불에 떨어지는 심판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서기관과는 달리 권세 있는 자와 같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르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말씀을 가르치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눅 4:32). 주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권세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믿었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토록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결국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립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 참된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천국에서 거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나사렛 사람들도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배척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선물로 받지 못합니다.
2. 불신앙은 영적으로 어둡게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마 13:54).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에 영적으로 어둡게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이유는 빛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소경된 자는 빛이 있어도 빛을 보지 못하며 자기 지혜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진리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나신 동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 없으신 삶을 사시고 요셉과 마리아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을 메시야로 나타나셨을 때에 절벽에 떨어트리려고 했습니다. 주님이 일년이 지난 후에 다시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의 근원에 대하여 궁금해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마 13:54).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 예수가 메시야로 오셨음을 믿어야 했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구원을 받았고,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얻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합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 19:39).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위협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을 장사한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이후로 영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예수님을 장사지냄으로 영화롭게 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되어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운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사탄이 빛 되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얼굴에 광채가 나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백성들과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수건을 벗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이 얼굴에 수건을 쓰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종교나 율법으로 하나님께 가려는 것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워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건을 벗어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 사도 바울은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수건이 벗어져서 빛 되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으면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방자하게 행합니다. 나사렛 동네가 하나님의 독생자가 자라신 마을이지만 주님을 거부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끓고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아간은 여리고 성에서 보물과 의복을 훔쳐 땅속에 묻었고, 그 죄로 인하여 그의 가족까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영혼을 소생시키며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황하는 자를 영혼의 돛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방황을 멈추게 합니다. 삶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3. 불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 13:58).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자 주님은 나사렛에서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능력은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사야 61장에 예언된 메시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시자 주님은 그 곳에서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씨앗입니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자라 큰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듯이, 믿음이 마음에 싹이 나면 자라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회로 삼는 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에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그의 불순종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욱 신뢰하는 불신에서 온 것입니다. 그의 불신앙은 골리앗 앞에서 사십일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조롱해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신앙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 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불신앙은 오히려 의로운 다윗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악한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사울과 같이 불신앙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장수라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로 일어납니다. 다윗은 물맷돌 다섯개를 가지고 골리앗을 대적한 것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의 분량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에 자신의 생명 조차도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믿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골리앗을 무너트린 그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의 지혜나 육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위대함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다 넘어지는 이유는 환경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이 온다고 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7) 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 자신을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시기를 간청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오라는 말씀을 듣고 과감한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걸어갔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는 물 위로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담가 문둥병이 치유받는 능력과 같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시 바람을 보고 무서워합니다. 베드로는 순간 바람을 보면서 믿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고 바람이 보이자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떠나 바다에 빠졌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주님이 베푸신 능력이 베드로의 불신에 의하여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은 베드로의 믿음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베드로의 불신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주님보다 환경을 의지함으로 믿음에서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기회가 찾아옵니다. 고난과 역경은 엔게디 광야에서 믿음을 키웠던 다윗과 같이 믿음이 자라가게 하는 훈련의 장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에서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의지하는 것은 불신으로 가게 하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가나안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듯이,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순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인내하는 삶에서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한송이 꽃이 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더 큰 능력을 행하시리라 믿습니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강해 (41) - 침례 요한의 사명과 순교(마 14:1-12). (0) | 2019.11.30 |
---|---|
마태복음 강해설교(상) 출간입니다. (0) | 2019.10.19 |
마태복음 강해(38) - 천국의 가치와 능력 (마 13:31-33, 44-46). (0) | 2019.08.17 |
마태복음 강해(37) -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마 13:24-30). (0) | 2019.07.13 |
마태복음 강해(36) - 씨와 네 가지 땅의 비유 (마 13:1-9). (0) | 2019.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