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37) -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마 13:24-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30).
진품과 모조품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진품은 거짓이 없는 본체이고, 모조품은 진짜인 것처럼 속여서 꾸며놓은 것입니다. 진품은 그 가치에 따라 값을 매기지만, 모조품은 아무런 값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진짜처럼 만들었지만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거짓 신인 우상의 차이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죽은 거짓 신과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뀌어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지만, 사탄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통하여 그 차이점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가라지와 알곡의 세 가지의 차이점을 나누고자 합니다.
1. 가라지와 알곡은 아버지가 다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4-25).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농부의 원수가 밤에 와서 좋은 씨 가운데 가라지를 몰래 뿌리고 갔습니다. 즉, 밭에 두 가지의 씨가 뿌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밭의 주인은 농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합법적으로 자신의 밭에 씨를 뿌렸지만, 원수가 와서 몰래 가라지의 씨를 뿌리고 간 것입니다. 주님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 (마 13:38-39).
밭에 씨를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는 독보리라고도 하는 ‘가짜밀’을 의미합니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열매가 나타나기까지는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보리인 가라지를 먹으면 설사나 구토가 나타나고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밤에 몰래 밭에 좋은 밀을 심은 곳에 가짜밀을 심어 놓고 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들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사탄의 자녀들은 죄에서 태어나서 죄가 왕노릇하며 사탄을 추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의하여 죄를 범한 이후로 이 세상은 죄가 다스리는 어두움의 나라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빛의 나라가 공존했습니다. 가인이 죄의 권세에 순종하여 어두움의 나라를 대표한다면, 아벨은 한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자녀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삭이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상징한다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떠나 어두움의 나라를 선택한 인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영적인 고찰을 하겠습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 (마 13:38). 이 세상에서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니 썩지 아니할 씨로 되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복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듭난 다는 것은 생각이나 사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거듭나는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성전이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7:20).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귀가 찾아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셨습니다. “...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 (마 13:38-39). 마귀가 심은 것은 가라지입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 사탄은 거짓말장이며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지만 죄의 유혹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탄의 어두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어두움의 길이며 사탄을 아버지가 되는 멸망의 길입니다. 죄의 저주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죄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모두가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다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3).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가 진노의 자녀로 살아가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를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길은 가인이 걸어간 길이며, 에서가 선택한 길이며 아말렉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한 길입니다.
오늘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며 알곡으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을 아버지로 선택하고 싶다면 죄의 노예로 살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2. 알곡과 가라지는 열매가 다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6-27).
가라지는 성장하는 과정에는 밀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가 자라는 과정에서는 알곡과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가라지가 자라게 되어 열매를 맺으면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5-26) 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의 씨가 뿌려진 후에 싹이 나서 열매를 맺으면 알곡과 다른 가리지의 열매가 보입니다. 이때 종들이 와서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7-28). 종들은 종들에게 좋은 씨를 심었는데 왜 가라지가 생겼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고 답변하자, 종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가서 뽑기를 원하시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29)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곡식까지 뽑아 오히려 피해를 입게 하니까 추수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라지의 열매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1). 가라지가 맺는 열매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가라지는 사탄의 자녀들입니다. 사탄의 자녀들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서기관들이나 바래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실상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기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앉아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며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막는 자였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3,15).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넘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게 할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을 거부함으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라지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23) 라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제사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낸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38-40).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느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서 거부하고 바알세불인 귀신의 힘을 입는다는 모욕적인 언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에 주님은 가라지는 외형적으로는 종교적인 옷을 입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생명이 없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하는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알곡은 열매를 맺습니다. 알곡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기에 하나님께 합당한 의로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요한 1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열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 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요일 2:1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었기에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과 죄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육신을 입었기에 넘어지고 순간적인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나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 3:4,6).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하는 것은 의와 평안과 기쁨입니다. 죄와 어두움은 사탄이 가져다 주는 나라의 특징입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과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의 풍성함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7).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우리 안에 거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4-5).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으며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가라지에서는 사람을 넘어뜨리며 불법을 행하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라지는 마귀의 자녀이기에 어두움에서 활동하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알곡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영혼의 열매인 것입니다.
3. 알곡과 가라지는 영원한 처소가 다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30).
주님은 가라지를 미리 뽑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추수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30). 주님은 추수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곡식은 모아 주님의 곳간에 넣으라’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미래에 받을 추수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가라지는 풀무 불에 던져질 것이지만,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42-43).
가라지가 불사르는 모습에 대하여 주님은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13:41-42)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라지는 추수의 때에 불로 심판당할 것에 대하여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요? 첫째, 지옥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43, 47-49). 지옥이라고 하는 곳은 불과 유향으로 타는 불호수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지옥에 던져진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며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는 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지옥은 영원한 곳입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지옥은 영원히 불이 타는 곳으로서 영원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라지는 풀무풀에 던져지서 울며 이를 간다고 하셨습니다. 풀무불이란 화덕으로서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의미합니다. 불이 지피는 아궁이가 뜨거운 불로 숯을 태우듯이, 영원히 타는 불못은 영혼들을 삼키며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 고통의 깊이는 아무도 알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영원한 고통을 당하며 울며 이를 가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지만,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두 가지의 부활을 예언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 12:2). 영생의 부활을 얻어 하늘의 빛과 같이 빛나며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는 자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는 자가 있습니다. 알곡이 들어갈 천국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또 내가 보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지만, 그들의 열매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구별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즉시 뽑지 않는 것은 추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알곡인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나셨는지요? 아니면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고 있는지요? 이 시간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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