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0) - 문제 해결의 열쇠는 믿음이다(마 17:14-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가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주님이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며 기쁨으로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큰 문제와 씨름하는 다른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아홉명의 제자는 최선을 다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큰 실망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주님이 신성으로 변화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감동받을 때와 같습니다. 그들은 곧 주님이 메시야로 자신을 드러내셔서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가 임박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더구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라고 하시자 그들은 더 크게 감격했습니다.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변화되신 이 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변화로 인하여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이 계획하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며, 제자들은 아직 배워야 할 교훈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가 되는 참된 의미를 더욱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훈을 받는 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변화산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가 가득한 무리들 속에서 였습니다.
오늘 인생의 문제를 직면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주님의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며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 17:14-15).
우리의 인생에서 주로 살아가는 곳은 변화산의 정상이 아니라, 다윗의 고백과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문제를 마주하며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인생은 문제가 없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하여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믿음의 담대함을 얻게 되었고 골리앗과 같은 거인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기쁨은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 제자들과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후에 사울왕의 신하가 되고 그 후에 사위가 됩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목동이었지만, 인생에서 감당할 수 없는 큰 변화를 경험하며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죄가 없었지만 사울왕에게 쫓겨 도망하며 광야에서 숨어 지내야 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며 고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다윗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도망하는 비참한 신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4-5). 다윗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이 대윗과 함께 하시며 그 잔이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이기에, 우리는 결코 혼자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간질을 앓는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찾아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 17:15-16). 그는 간질로 심히 고생하는 아들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어려움에 대하여 실토했습니다. 마가복음은 고통당하는 아이는 벙어리로서 말을 하지 못할 뿐더러 귀를 먹어 듣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벙어리로서 말을 하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며 간질과 같이 자주 넘어지는 이유는 더러운 귀신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트리면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가는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때 아비는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으나 능히 고치지 못했기에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 9:18). 고통당하는 아버지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 나아가 고쳐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기에 그 분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 간절한 기도로 무거운 짐을 아뢰일 때에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쉼을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시 68: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지시며 고난에서 구원을 주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라고 했습니다. 고통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님께 찾아가자, 주님은 그 아버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하나님께 나아가 문제 해결을 도우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와 도우심의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히 나아갈 때에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3)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인생의 희망이 사라진 절망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절망이 찾아오는 순간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 우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믿음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간구했던 이유는 주님의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마 17:17).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시며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자 아이가 엎드려져 거품을 흘렸습니다. 이때 아이의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막 9:25). 주님이 명하시자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자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제자가 한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주님께 자신들은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는지 묻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적은 믿음이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이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제자들의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더라도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면 옮길 것이며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산을 명하여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러한 작은 믿음 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적은 믿음은 어떠한 믿음을 의미하는가요?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였습니다.
첫째로 적은 믿음은 염려하는 믿음입니다.
염려하는 믿음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재물을 섬긴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믿는 자들이 재물이 인생의 목적이 될 때에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인생이 재물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떠나고 재물이 쌓여갈 때에 그 곳에서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며 섬기려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이나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길르신다고 하시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0-31). 우리가 먹고 입는 기본적인 필요에 대하여 염려하여 물질을 섬기게 되는 것이 믿음이 적은 자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적은 믿음은 의심하는 믿음입니다.
이는 주님보다 환경을 더욱 의지하는 자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찾아오고, 두려움은 믿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요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물 위를 걸어가다 갑자기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베드로가 무서워했던 이유는 주님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함께하시며 지키시는 주님을 의심하게 되자 바다와 바람의 소리에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의심이 찾아오며 두려움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기쁨으로 시작한 믿음의 여정이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세상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며 자신의 모습이 작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을 의심하며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을 의심하게 됨으로 주님이 책망하신 작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적은 믿음은 낮은 자존감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주님이 주신 권세를 의심하여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고를 갖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권세를 신뢰하지 않을 때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마 17:1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벙어리 귀신으로 고통당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사탄을 쫓는 권세가 있었지만, 그 권세를 믿음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변화산에 가셨기에 두려움이 먼저 앞섰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권세가 있음을 망각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귀신에게 선포하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주신 권세를 의심했기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알라가다 앉은 뱅이 된 자가 구걸하자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베드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선포하자 앉은뱅이가 힘을 얻어 치유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이제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권세를 선포하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아이의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우리가 주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갖는다면 어떠한 문제도 주님 앞에서는 문제가 기회가 됩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볼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광야에서 숨어 지내던 다윗이 주님만을 바라볼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욥이 고난 중에서 주님만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욥의 질병을 고치시고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룻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고 다윗의 증조모가 되게 하시며 메시야의 혈통을 잇는 영광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3. 우리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제자들이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 이유를 묻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며, 적은 믿음을 극복하는 기도의 능력을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주님께서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흠정역에서는 마태복음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 하느니라.”(마 17:21)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사람이 기도하며 금식할 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일으키시는 역사에 대하여 가르치며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기도하는 삶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가져다주며,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살아나게 하여 능력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을 믿기에, 우리는 이 시대에 더욱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은 간절한 기도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의 삶에서 기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일들을 보았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찾아올 때에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은혜가 있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보내시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게 하셔서 적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치나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함께 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기도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하나님이 견고한 성읍과 놋 성벽과 같이 하셔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자 할 때에 교회가 한 마음이 되게 하시고 필요를 공급하심으로 기적의 건축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 환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함께 꿈을 꾸며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서 큰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저희 부부가 유학을 할 때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고 믿음으로 신학 공부를 잘 마치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믿음과 기도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만날 때에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며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이 적은 믿음으로 무능력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탄의 공격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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