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51)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전세(마 17:22-27).

비전의 사람 2020. 5.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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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51)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전세(17:22-27).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2-23).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율리우스 시저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은 그가 로마에 돌아와서 신뢰했던 부하인 부르투스에 의하여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합니다. 이때 율리우스 시저는 자신의 부하가 자신을 배반하고 죽이기 위하여 칼로 자신을 찌르자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일화는 그가 포로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사건입니다. 그가 로도스라는 섬을 지나다가 해적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이때 해적들이 율리우스 시저의 몸값을 금 20달란트로 매겼다고 합니다. 20달란트의 금은 로마의 1개 군단을 모집할 수 있는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때 시저는 자신의 몸값은 20달란트로 책정한 것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고, 실제로는 50달란트라고 하며 몸값을 스스로 올렸습니다. 그 정도로 율리우스 시저는 대범했던 장군이었습니다. 그 금액은 아마도 천문학적인 숫자였을 것입니다. 해적들은 그의 몸값에 너무 놀랐고 대접을 잘 해 줍니다. 이때 율리우스 시저의 부하들이 로마로 돌아가 금 50달란트의 몸값을 구해오자, 시저는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자유가 된 율리우스 시저는 군대를 모집하여 자신을 가두었던 해적 근거지를 공격하여 자신의 금 50달란트가 다시 찾고, 해적을 모두 소탕하였습니다. 율리우스 시저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자유하기 위하여 몸값으로 지불해야 했던 것이 바로 몸값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낚시해서 잡은 고기의 입을 열어 얻은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전세의 의미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2-23).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이후에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변화산은 헐몬산으로 추정하고 있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면 그 곳을 들러야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2-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에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며 우리를 섬기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 관례이지만, 주님께서는 만유의 주가 되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주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다고 하신, 대속물(ransom)은 노예나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값을 치루는 몸값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노예로 되어 영원한 고통과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몸값으로 지불하신 금액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으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신 것은 구속입니다. 구속은 대속물인 몸값을 주고 노예를 사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돈을 빌려서 갚지 못하면 자신을 노예로 팔아 빌린 돈을 갚았습니다. 자신이 노예가 되었기에 스스로는 종의 위치에서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유하게 되는 길은 능력있는 사람이 빚을 모두 갚아주고 그를 다시 사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기업무를 자로서 값을 주고 나오미의 기업을 사서 돌려주고, 룻을 사서 결혼하여 가문을 회복시켜 줍니다. 이는 보아스가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의 노예로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을 아시고,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루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 ...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5:9)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벤허는 부유한 유대인이었지만 로마군에 의하여 부당하게 죄인이 되어 노예가 됩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투함의 노를 젓다가 전투에서 침몰하게 됩니다. 이때 벤허는 급하게 배를 탈출하다가 부상당한 총사령관을 발견하고 함께 탈출합니다. 총사령관은 자기가 전투에서 진 것에 대한 책음으로 자살하려고 하지만, 벤허가 말립니다. 이때 로마 해군에 의하여 구출되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로마의 영웅이 되었고 그는 자신의 돈으로 그를 구속하고 양자로 삼게 됩니다. 벤허는 노예에서 장군의 양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군이 값을 치루고 벤허를 구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욥은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구속자되신 하나님을 볼 것을 소망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26).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지불하셔서 우리를 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려고 드리신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드린 대속물이었습니다.

 

2. 성전세의 의미는 생명을 대신하여 드리는 대속물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17:24).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에 도착하시자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17:24).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은 성전세를 거두는 자들이었습니다. 반 세겔은 당시의 두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 이틀 분량의 품삯이었습니다.

 

성전세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십 세 이상 된 자는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의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30:12). 각 사람이 속전세를 드릴 때에는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도 덜 내지 말고 모두 하나님께 반 세겔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속전은 성막의 봉사에 쓰여져야 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30:16). 하나님께서는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이 속죄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속전은 히브리어로 코페르로서 대속물을 의미합니다. 속전의 히브리어의 원뜻은 속죄하다의 카파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죄하는 것은 희생 제물의 피를 번제단이나 속죄소에 뿌려 죄를 씻음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소를 위하여 반 세겔을 드려야 하는 것은 속전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속전을 사용하는 다른 경우는 생명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가 다른 사람을 받아 죽으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여야 하고, 소주인도 죽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임자의 소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인이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지 않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속죄금을 내어 배상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21:30). 자신의 소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죽으면 자신과 소도 같이 죽어야 하지만, 생명의 배상금인 속전을 내면 죽임을 면하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반세겔의 속전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심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해마다 반 세겔을 드렸습니다. 결국 속전인 성전세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속전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임을 인정하는 동일시였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 2: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자신을 속전인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대속물인 속전은 대속의 죽임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성전세인 반 세겔의 교훈을 통하여 영적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덕을 세우는 믿음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17:25).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예수님이 반 세겔을 내시는지 묻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세는 일종의 세금이었지만 성전과 제사장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성전세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쿰란의 광야에 거주했던 에센파는 해마다 내지 않고 평생에 한번 낸 후에 성전세를 거부했습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17:25). 세상의 임금들이 세금을 받는 목적은 자신의 왕국을 이끌기 위해서 였기에 왕자나 공주와 같은 자녀들에게는 받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타인에게서 왕들이 세금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17:26-27). 예수님께서는 아들들은 세를 면하나, 저희들로 오해케 하지 않도록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의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세겔로 주님과 베드로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는 지상의 처소가 성전이고,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서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이들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 지어졌는데 삼일 만에 일으키는 의미에 대하여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21). 예수님이 성전이시기에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에 아들들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해하지 못함을 아셨기에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의 입에서 얻은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내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얻은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얻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물고기로 하여금 한 세겔의 동전을 입에 물게 하시는 예수님의 섭리는 발람의 당나귀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지만 저희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성전세를 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온 인류를 위한 대속물인 속전이 되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유대인들과 불필요한 다툼을 피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서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가 음식의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 배경을 가진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정결한 음식 이외는 어떠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방 배경을 가진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음식에 대한 율법이 폐하여 졌기에 어떠한 음식을 먹는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이 성취되었기에 어떠한 음식도 부정하거나 정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즉 어떠한 음식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먹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14:3).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인 것입니다. , 먹는 것으로 인하여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4:19). 교회에서는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고 서로 덕을 세우며 화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서로를 받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속전으로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걷는 반 세겔의 성전세는 자신의 목숨과 비교하면 너무나 적은 가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생명을 드려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반 세겔의 성전세로 인하여 사람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오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영원한 속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녀이기에 지체들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은 일로 오해가 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