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에게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한 세겔을 얻어 성전세를 내라고 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묻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아직 그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어린 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천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은 후에 영혼이 들어가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믿는 자의 미래의 처소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의 새로운 마음에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며 그분의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는 그 분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세워가고 계십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용서하는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지켜야 할 제자도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는 형제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제자들이 주님께 질문한 배경은 제자들간의 경쟁심이었습니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에는 경쟁심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과 경쟁하였고, 에서는 야곱과 경쟁하였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요셉이 가진 특권을 시기하여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경쟁심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인정받아야 하는 강한 정욕에 이끌리는 존재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후에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경쟁심이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크게 격려하셨고, 변화산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세를 내는 문제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낚시를 하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신임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제자들 중에서 가까이 두시면서 더 많은 영적 훈련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에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로 인한 경쟁심이 생기면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는 그들이 스승이신 주님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섬기시기 위하여 희생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오셨지만(마 10:45). 제자들은 섬김을 받기 위한 높은 지위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라고 하시며 섬김의 소중한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날에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하는 제자들이 서로를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하지 않고 순수와 겸손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우리는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2-3). 우리는 제자들간에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과 뜻과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종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수록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연약한 형제를 존중해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아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힘이 없는 작은 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어린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제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서로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는 주님의 상을 받는 것이며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상을 후에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확장시켜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시기와 질투가 지배한다면 경쟁심으로 인하여 다툼과 원망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마음으로 서로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며 서로를 축복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1) 존중은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다른 지체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소자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외모나 경제적인 차이,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왕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믿는 자를 실족시키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자는 실제로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실족시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거운 죄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형제를 근심시키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였지만,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음식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식물로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음식과 같은 것으로 서로를 실족시키지 말고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7,19). 우리는 서로를 향하여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다른 지체를 실족시키는 일을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존중은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영접하는 자는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영접하는 자는 형제에게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주님께서는 우리가 손이나 발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실제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는 손과 발을 찍어 불구자로 살다가 천국을 가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는 것이 그 만큼 큰 결과를 가져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형제를 함부로 대하거나 비방하거나 중상모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하셨습니다. 즉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은 형제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은 눈으로 범하는 죄인 것입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 우리는 눈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은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체 중에서 작은 자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기에 업신여기지 말고 겸손과 사랑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출동 경찰이 제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무릎이 조지 플로이드 목에 8분 이상을 눌러 혈액이 막혀 숨진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경찰과 백인들의 우월의식에 억눌렸던 사람들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부 흥분한 사람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벗어나 약탈과 방화를 하며 주정부군까지 투입되는 상황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의 흑인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의 거주지도 차이가 나며, 학교의 교육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이 흑인들을 점점 소외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흑인의 목숨이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소중하고 인권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전 세계적인 의분을 일으킨 것은 소자를 대표하는 한 흑인의 생명이 공권력을 대표하는 한 경찰에 의하여 무지비하게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는 서로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우리는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는 것은 모습은 서로의 믿음의 분량에 대하여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 14:3).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업신여기거나 판단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이나 눈으로 죄를 범하지 말고, 서로를 존귀한 보배로 여겨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3. 우리는 길잃은 자를 찾아 구원해야 합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 18:12).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서로를 존중으로 대하는 제자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흠정역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마 18:11)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제자들도 주님과 같이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가 가서 길 잃은 양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 18:12). 목자는 함께 있는 아흔 아홉 마리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이 우선 순위인 것입니다. 그는 아흔 아홉을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아 찾으러 갑니다. 만일 그가 길 잃은 양을 찾으면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는 서로를 존중함으로 실족시키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지체가 목자를 떠나 방황하면 그 양을 찾아 아흔 아홉이 있는 교회의 공동체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체들을 영접할 뿐 아니라, 지체가 떠나지 않도록 잘 지키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소자 중에 하나라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전도를 통하여 목자되신 주님께로 초청합니다. 우리의 본분인 전도의 사명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전도는 잃은 양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잃은 양을 찾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지체 중에서 길을 잃어 방황한다면 우리는 찾아 아흔아홉마리의 양과 함께 하도록 교회의 지체로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잃은 것은 목자를 떠나 방황하는 것입니다. 양을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잃은 양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체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며 사랑과 겸손으로 서로를 돌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자의 질문을 통하여 천국 백성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작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주님 안에서는 보배와 같이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영접해야 합니다. 형제를 실족시키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혹 형제가 길을 잃어 방황한다면 찾아가 목자되신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두가 목자되신 주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받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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