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나는 누구인가?

비전의 사람 2022. 1. 15.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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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1-12).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가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자신의 성별, 나이, 고향, 직업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인격과 믿음, 그리고 사고 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외부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인식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서 부르시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종이 되어 괴롭힘과 학대를 당하고 있었기에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의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보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합니까?

 

모세의 질문은 오늘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이기에 이 어려운 시대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누구이기에 이 어려운 시대에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며,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감당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반응하며 순종하고자 애쓰는가? 우리의 삶의 방향은 우리가 누구인가와 같이 자신을 인식하는 여부에 따라서 결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 지는 자신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80세가 될 때까지는 하나님을 대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40년간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고, 40년간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까지는 아무런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다가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에게 거절당하였고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광야에서 목자로 40년간 살았고 80이라는 나이 앞에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새롭게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3:4).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강력한 변화를 맞이하였고, 그의 변화는 그를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모세와 같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라고 말씀하시는가요?

 

1. 우리가 전에는 마귀의 자녀였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3:8-10).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있을 때에 바로를 섬기는 종으로 살아갔습니다. 당시에 외국에서 애굽으로 방문한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히브리 사람들은 바로의 종이 되어 고통하는 민족이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유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지만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어 학대와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출애굽하여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오자 그들은 비로서 자유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서 살아갈 때는 속박과 구속으로 인한 큰 고통을 당하였고, 그들은 바로를 섬겨야 했습니다. 바로를 섬기면 섬길수록 바로는 그들을 더욱 학대하며 심지어 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까지 펼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죄 가운데 살아갈 때는 마귀를 왕으로 숭배하는 마귀의 자녀들이었습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아갈 때는 사망과 죄가 왕노릇 하고 있었고, 아무런 소망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구원자가 오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양자의 영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을 받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5).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양자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직 죄와 사망에 매여 살아가는 마귀의 자녀인가? 아니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영적 어두움에서 사단의 권세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이 자녀인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자녀라면 마귀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느니라 ...”(8:44)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아비인 마귀를 따라 욕심대로 행하고 거짓을 말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방탕하게 행하고 죄와 친구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 자녀인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속에 하나님의 씨인 말씀이 있어서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은 하늘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자신을 인식하면 하나님이 주실 소망을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로마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이르면 우리를 위한 놀라운 상급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실 놀라운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가 전에는 육신으로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인생에는 두 가지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6-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하면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면 하나님과 화목하며 그 결과로 평안과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요?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육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육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모세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님 요게벳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배워갔지만, 모세는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욕구가 아주 강한 자였습니다. 모세가 마흔 살이 되어 자기 형제들을 보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 사람에게서 구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의 육신적인 행동의 결과는 결국 살인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모세는 다시 나가서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화해를 시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하면서 그의 권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인 것을 탄로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살인이 드러나자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미디안으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에서 사십년을 지내며 자신이 누군지를 잊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와 함께 하시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의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였고, 그가 지팡이를 잡아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품에 넣을 때에 문둥병이 발하엿다가, 다시 품에 넣으니 손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갈 때에 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후로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실 때에 모세는 바로 앞에서 담대하였고, 그의 지팡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를 통하여 홍해가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하시는 은혜의 징표였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육체를 따라 행하며 지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우리는 전에는 진노의 자녀로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자였습니다. 마치 모세가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삶의 특징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를 맺고 분쟁과 시가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도 그와 같은 것들이라 ...”(5:19-21). 우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에 죄인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던 때의 열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로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 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에게 사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사도 바울은 자신이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도우시며 공급하심을 확신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그의 광야 생활에서 함께 하시며 능력을 주시며, 능히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날마다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면 되었습니다.

 

새 새명으로 살아가는 삶은 인생에 대하여 아무 염려하지 말고 맡기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온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빚어지며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헤가 임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며 빚어가시며 공급하실 때에 우리는 그 분의 은혜를 느끼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이 되어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종이 되었다는 것은 이집트라는 거대한 제국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예는 아무런 자유가 없고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큰 학대를 당하기도 하고, 아무리 잘해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노예는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와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면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을 건축했습니다. 흙을 이겨 벽돌을 구웠고 농사를 짓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희생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지만 그 결론은 더욱 큰 바로의 학대였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상징합니다. 그는 사탄의 권세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죄는 우리를 속박하고 나중에는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사탄은 죄를 통하여 자신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10:10)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탄이 우리를 죄의 노예가 되게 한 이후에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모두가 죄의 종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되었지만, 이제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출애굽한 이후에 시내산에서 일 년간 거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19:5-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나라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세우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한 너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우리는 자신을 더 이상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의의 병기로 쓰임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네로가 황제가 된 이후에 그리스도인을 향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재건하기 이하여 로마 시내를 불태웠고, 시민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속죄양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핍박으로 인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처형되었고 베드로도 로마에 의하여 순교 당했습니다. 이러한 핍박으로 고통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불같은 핍박이 찾아오자 과연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하여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합니다. 핍박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때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비록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론의 자손으로서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왕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멜기세덱이 왕이며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왕같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섬김과 같이 우리도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은 왕의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사탄을 섬겼으나, 이제는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왕의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특권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핍박으로 고통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당신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주님을 섬기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왕의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증거가 출애굽한 이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증거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의 제사장으로서 주님을 찬양으로 섬기며, 은사로 섬기며, 물질과 재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시간에 그들을 향하여 시련에서 약해지지 말고도리어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왕의 제사장으로서 세상에 굴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섬기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환경에 놓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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