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 강해(6) -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요일 2:12-14).

비전의 사람 2022. 5. 1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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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6) -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요일 2:12-14).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

 

달라스 제일 침례 교회를 50년간 이상 사역을 하신 크리스웰 목사님은 교회의 성도들을 젊은이라는 뜻인 ‘lad'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나이가 육십이 넘은 성도들에게도 젊은이 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의 연세가 80세가 넘으셔서 연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사도 요한도 연로한 나이로 인하여 서신의 수신자들을 향해서도 자녀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서 교회의 목회자로 오랫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의 나이는 그가 팔십대의 나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리더십아래 있는 성도들이 십대이든, 사십대 이든, 심지어는 육십대라도 그들을 향하여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자녀들아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을 향한 사도 요한의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을 향하여 자녀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영적으로 자녀와 청년, 그리고 아비의 삶을 살아왔기에 이제 믿음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용어를 각가 두 번씩이나 사용했습니다. 언뜻보면 우리는 사도 요한이 구분한 호칭을 신체적인 나이에 따라 나누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성장은 자녀들과 청년들, 그리고 아버지의 단계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이해하더라도 사도 요한은 그들의 영적인 나이로 나누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자녀들(little childre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시간 믿음의 삶을 살아온 성도들을 청년들이라고 했고, 믿음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온 성도들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자녀들이라고 표현했고, 자녀들 가운데 믿음에서 연소한 자들을 청년이라고 했고,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 생활하면서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영적인 성숙이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인 성숙은 신체적인 나이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열매를 맺으면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이 구분한 영적인 단계를 통하여 각자의 삶이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자녀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1:12).

 

사도 요한은 자신이 서신을 쓰는 이유는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의 원어는 그들의 죄가 단번에 용서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죄용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조건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경험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용서받아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어 의롭게 됨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13:37-38). 우리의 죄가 용서 받는 길은 모세의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행한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공로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일시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하여 두 가지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죄 용서 받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법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며 범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죄를 범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자녀로서의 신분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19절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범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제를 회복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변화는 것은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의 관계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죄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43:2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도말하다는 히브리어로 마하로서 씻어내다또는 기억에서 지워버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주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무겁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웨이드 보그스는 미국의 유명한 야구 선수였습니다. 그는 삼천 안타를 쳐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선수 경력 전성기 때에 다른 여성과 스캔들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 이러한 소식이 뉴스를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스캔들 뉴스가 방송된 때는, 부적절한 관계가 이미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보그스는 아내에게 자신의 죄를 이미 자백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유명한 앵커인 바바라 워터스가 보그스와 그의 아내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와터스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문제를 일으켰는가요? 화려한 부와 명예가 문제였는가요? 아니면 당신을 유혹한 사악한 여자가 문제였는가요?” 그는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그의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스캔들을 일으키며 잘못한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워터스 앵커는 자신이 죄인이기에 죄를 범했다고 자백하는 그를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보그스의 아내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남편을 용서했는가요?” 그러자 보그스의 아내는 나는 남편의 죄를 용서했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강력한 말을 했습니다. 용서는 가장 강력한 말인 것입니다. 웨이드 보그스는 자신이 죄인이었기에 어리석은 죄를 범했음을 인정했고 아내에게 자신의 죄를 이미 자백했습니다. 그는 다른 여인과의 관계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보그스의 아내는 남편의 죄를 진심으로 용서하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죄로 인하여 원수되었던 관계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분의 용서는 그 분의 약속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셨기에 모든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통하여 죄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주님께 사랑과 헌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청년은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입니다.

 

“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14).

 

신약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영적인 아기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첫째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유아들같이, 새로운 성도들은 성장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라고 했습니다. 갓난 아이들이 모유를 사모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듯이, 믿음 안에서의 새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영적인 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영적인 아기에서 청년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갓 태어난 아기가 가족의 따뜻한 사랑 안에서 자라가듯이, 교회의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자녀들은 성숙한 성도들의 사랑과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영적인 아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육신적인 성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지만, 여전히 세속적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영적 어린아이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믿음의 삶을 살아왔지만 육신의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에 영적인 성장이 멈춘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흔 살이 된 사람이 입에 우유병을 물고 울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오랜 기간 주님을 섬기면서 영적인 아기로 머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아기에서 영적인 청년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영적인 청년의 특징은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요일 2:13).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승리를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적인 청년들은 사탄을 이기는 영적인 권세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과의 싸움애서 승리하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청년은 힘과 열정이 넘치고 비전으로 살아가는 시절입니다. 그들은 열정과 비전을 품었기에 사탄이 주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의 능력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4절에서 청년들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사도 요한은 청년에 대하여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청년은 주 안에서 강한 자들입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청년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강하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신체적으로도 강하여 높은 산도 오르고 축구와 같은 힘든 운동을 하면 지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열정이 생깁니다. 이와같이 영적인 청년들은 다윗과 같이 믿음에서 강한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에서 강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담대히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 안에서 강하고 담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한 자는 육신의 강함이 아니라, 믿음의 강함이 있는 영적인 청년들입니다.

 

둘째, 청년이 강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 영적인 청년들이 믿음 안에서 강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아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자신의 자아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우리의 신체를 강하게 하지만, 경건의 훈련은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에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적용하는 삶을 살아가며 기도하는 삶에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워 그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고 묵상하기 위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 청년은 악한 자인 사탄을 이기는 자입니다. “...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사도 요한은 청년은 악한 자를 이겼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해서 영적으로 강한 자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청년은 악한 자를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악한 자는 사탄입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권위를 양보하지 않는 한 사탄은 우리의 삶에 권세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일하도록 명분을 제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통하여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사탄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우는 사자같이 찾아와 자신을 삼키려고 할 때에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청년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탄을 이기는 비결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간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탄이 주는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에 대하여 신명기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4:7)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경배하면 온 천하를 얻게 한다는 유혹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4:10)라는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사탄을 패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싸워서 이기게 하는 삶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여 사탄의 권세를 이겨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영적인 강한 힘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과 힘의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실천에 있습니다. 말씀을 아는 지식은 뱀과 같은 사탄에게서 독이 든 이빨을 빼는 것과 같고, 마귀 사자의 입에서 이빨을 빼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듯이 두루 다닌다 할지라도, 뱀과 사자가 이빨이 없다면 어떠한 해를 끼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찾아오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은 주의 군사로서 사탄의 공격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3. 아비는 하나님을 아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요일 2:13).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요일 2:13)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비를 교회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라고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도 함께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것은 성숙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오랫동안 주님을 신뢰함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믿음의 삶을 살아온 성도님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오며 그 분을 향한 믿음이 더욱 자라가신 분들입니다. 인생의 풍랑과 고난에서도 실족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다윗의 마음으로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겨냈습니다. 극심한 고난이 찾아올 때는 욥기를 묵상하며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라는 말씀을 의지하며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망하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극심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젊은 시절 목회를 하면서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이때 스펄전의 할아버지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할아버지에게 폐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강단에 올라와 젊은 스펄전 목사의 어깨에 손을 올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찰스는 용서에 대하여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용서하는 삶을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십년 이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젊은 청년의 때에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갈 때도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갈 정도로 젊은 제자였습니다. 이제 그는 오랜 주님을 섬기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3)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사보다 사랑을 실천하고, 번제를 드리기보다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 분의 공의를 알아가는 것이고, 그 분의 거룩함을 알아가는 것이며, 그 분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긍휼하심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갈 때에 우리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기록할 수 없는 크신 사랑임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아갈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정하고 죄인인 가를 깨닫게 되어 더욱 자신을 정결하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아갈 때에 그 분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게 되어 어떠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은 우리의 구원에서 부터 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요일 1: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즉 영적인 생명을 얻었기에 참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성장하며 아비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알아갑니다. 우리는 삶의 경험, 즉 기도 응답과 시련에서의 극복 등과 같은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강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 용서를 받은 자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으로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강한 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여 사탄의 영향력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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