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 강해(4) -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 순종(요일 2:3-6)

비전의 사람 2022. 4. 3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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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4) -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 순종(요일 2:3-6)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우리가 살아가면서 확신을 갖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확신이 없는 삶은 인생의 여정에 많은 문제들을 가져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확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일 것입니다. 확신이 없다면 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을 못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한 형제님에게 예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세상에서 표현하는 평화의 왕이나 정도로 본질에서 벗어나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답변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는 것은 죽어봐야 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을 아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일 자신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핵심 진리를 모르고 믿음 생활하는 것은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무지를 가지고 나는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여러분은 인생의 중요한 문제인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당하게 된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영원히 한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요? 그러면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을 증거하는 열매가 무엇인가요? 로마서 8장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8:1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서 증거하고 있으며, 우리의 외적인 삶에서도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알게 하는 것의 증거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사도 요한은 참된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2-3). 하나님을 하나님을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줄로 안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서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교제하는 삶을 통하여 그 분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 그리고 섭리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희미하게 알다가, 영적으로 성숙하면서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알아갈수록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 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더욱 신뢰하는 믿음이 굳건해 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포 시장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선거 운동할 때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걸고, 그의 출신과 공약 등을 내걸고 지지를 호소합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목포 시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을 진짜 알려면 그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그의 가족이나 친구, 또는 가까이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그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인격을 알게 되고 일에 대한 열정과 신실함 등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즐기는 취미 생활 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포 시장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기에 그 분에 대해서 거의 모릅니다. 물론 그 분의 시정이나 얼굴, 이름은 알지만 그 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영생이란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인 영생인 것입니다. 이에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기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라고 했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 여러분에게 어떠한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아직 구원받지 않은 죄인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여러분 안에 역사하는 성령님의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젓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라고 했습니다. 갓난 아기가 모유를 사모하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욕구가 생기고 말씀을 먹음으로써 성장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배에 대한 열정과 기도와 말씀, 더 나아가 복음 전도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외적인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 모든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는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강조점을 두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는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자의 열매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은 서로를 사랑하는 새로운 성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3절은 우리가 알수 있는 세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셨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을 안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의심하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떠한 질병이 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우리는 은행에 얼마의 잔고가 남았는지도 알고 싶어하며, 그리고 우리는 갚아야 할 대출금이 얼마인지도 알고자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에 대하여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증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행실은 인격의 증거입니다. 나무에서 꽃과 열매가 나오듯이, 인격에서 행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는단어를 그의 서신에서 삼십번이나 즐겨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배움을 통해서도 알수 있고,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교훈은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점진적으로 알아가게 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통하여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운동에서 초보와 베테랑의 차이는 경험을 얼마나 했느냐 입니다. 베테랑은 수년간의 경험을 통하여 운동 시합에 대한 지식을 축적했습니다. 운동에서 경험은 실제 시합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초보자는 베테랑보다 더 나은 재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테랑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 없기에, 그는 실전에서 유능하게 시합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나하면 그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갈 수 있습니다. 지키다는 것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성스럽게 보물을 간직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보물을 지키는 것과 같은 태도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배와 같이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빚을 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두십니다.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순종의 중요성입니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우리의 예배보다 더욱 귀하게 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7:23)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4절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 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이미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요한일서 19절의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게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24절에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일이 있지만, 구원받은 자는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가 그 안에 없는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러한 서신을 기록한 이유는 당시에 활동했던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도가 범하는 죄를 가볍게 여기며 그것을 옹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즉 육체는 타락했기에, 그 육체로 타락한 삶을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이기에 영은 육체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짓는 것을 가볍게 여기며 심지어 용납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라고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죄를 범하고 그 죄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사람의 안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구원받은 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진실로 자백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두움이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여 술을 취하는 방탕한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험담이나 욕을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음란의 죄에 빠져 중독되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고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영혼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배 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요? 아니면 아직 죄인으로 살아가며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사랑을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사도 요한은 5절에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이라고 했는데, 이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습관이나 삶의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지키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하게 되었다(perfected)는 것은 헬라어로 성숙하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를 주저하는 것은 아직 미성숙한 사랑으로 섬기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에는 세 가지의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필요 때문에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원하기 때문에 행동합니다. 노예는 해야 하기 때문에 주인을 섬깁니다. 노동자는 월급에 대한 필요 때문에 직장 생활에서 상사의 지시를 따릅니다. 만일 상사의 지시를 따르기 싫어한다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월급을 받지 못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요에 의하여 열심히 일을 하곤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랑은 사랑에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무나 필요가 아니라, 원하기 때문에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소홀히 하고, 기도와 말씀에 무관심하며 더 나아가 형제 사랑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 중의 누구는 우리가 해야 하거나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의 누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이와같이 순종의 열매를 맺는 사랑은 성숙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동기로 주님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아직 미성숙하다는 증거입니다. 결혼을 하면 처음에는 사랑이 아직 미성숙합니다. 미성숙하기에 다투기도 하고 불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부의 사랑은 더욱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주님과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며 그 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리하여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자라가게 합니다.

 

리스도인의 순종은 참된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되지 않기에, 순종이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순종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6절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6)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패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실 때에 교훈과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릴 때에는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사셨고 종의 마음을 품고 사셨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주님이 행하시는대로 우리도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 안에 있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의 화를 절제하고, 은혜의 말을 하며, 자신의 부패한 욕구를 절제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을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온유하며 다른 사람의 짐을 지며 핍박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그 분이 사셨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는 제자가 되어 그 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발걸음(In His Steps)이라는 찰스 쉘던 목사님의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어느 주일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허름한 옷을 입은 그 사람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배당의 중간 자리에 앉았다가, 예배 중간에 그 사람이 일어나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어려운 처지에 대하여 냉담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주가 지난 후에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예배를 중단시킨 그 사람에 대한 냉담한 태도에 대하여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씩 일어나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후에 그들은 날마다 무엇을 하기 전에 해야 할 사항들을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삶과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교회 성도들이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사람들의 삶이 바뀌기 시작하자 전체 마을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사도 요한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6)고 했습니다. 우리는 순종에 기초하는 삶을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행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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