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5) - 형제를 사랑하라(요일 2:7-11).

비전의 사람 2022. 5. 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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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5) - 형제를 사랑하라(요일 2:7-11).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9-10).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시험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두 번째 시험은 형제 사랑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일서 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2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회의 혈액 순환과 같습니다. 몸에 있는 혈액 순환 시스템은 피를 몸의 세포 곳곳에 보내어 몸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아 활력있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 혈액 순환 시스템이 고장난다면, 그 사람은 큰 위기를 맞이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뇌출혈이나 뇌경색, 심근경색과 같은 것이 바로 몸의 혈액이 막혀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지난 주에 유명 배우인 강수현 씨가 뇌출혈이 일어나 심정지가 일어나 아직까지 의식이 회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혈액 순환이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몸인 교회도 사랑이라는 혈액 순환 시스템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여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하게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동맥에 혈전이 생겨 영적으로 심장 마비와 같은 위험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상황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 입니다. 에로스는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했습니다. 에로틱이라는 말이 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필레오입니다. 필레오는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거나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지칭했습니다. 세 번째는 아가페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교회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표현해야 할 사랑으로 성경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과 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1.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은 사랑입니다(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7-8).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을 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옛 계명이며, 이 옛 계명을 다시 그들에게 새 계명으로 쓴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옛 계명이면서 새 계명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옛 계명이기도 하고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옛 계명인 이유는 사랑은 구약 성경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19:18). 이와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율법을 통하여 주신 옛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새 계명이고도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이와같이 사랑은 구약에서 주신 옛 계명이기도 하면서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사랑은 율법에서도 주신 것이고, 신약에서도 주신 계명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에서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이지만, 우리는 교회에서 지체들과 연합하며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려울 때를 만나기도 합니다. 기질이 다르거나 인격의 차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좁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죽기까지 희생하신 주님을 닮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만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본질상 이타적인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당신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나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항상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신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나 유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희생적인 사랑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희생적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죄의 빚을 갚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서로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바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세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십계명을 주셔서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계명에 더하여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들이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다투며 미워한다면 이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정통 교리를 가진 자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거짓된 교사들은 지식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1절에서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서로를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과 요한에게 진리를 아는 지식은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함정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으로 교만하게 되면 형제를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는 죄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사랑을 더할 때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우리가 얼마나 아느냐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과 같이 행하며 주님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이웃에게서 도적질을 하지 않고,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고 거짓 증거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웃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향한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와 둘째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와 뜻을 모아서 보여주는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을 주실 때부터 핵심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부어주셔서 서로를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임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정의는 한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시 추적하면서 그 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은 위대한 희생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를 사랑하셔서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장이인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받던 삭개오를 부르시면서 그의 집에서 식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셔서 그를 구원하시고 그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던 그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대화하시면 복음을 전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것을 알게 하셔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아셨고 그들을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모두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말을 하기도 하고, 주님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주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그를 위대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그 분의 창에 찔린 옆구리와 못이 박힌 손을 만지게 하심으로 그의 믿음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마는 다시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주님은 유다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만일 유다가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면, 주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약함이 있었고, 때때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3-44). 예수님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그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로마 군사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는 사람들을 도리어 사랑하시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들 등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은 그 자체가 사랑이셨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본질인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주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모라비안 교도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람은 진젠도르프 백작이었습니다. 그는 미술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한참동안 응시하고 있다고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자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고통하시는 예수님을 오랫동안 지켜보다고 눈물을 흘리며 이 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는 미술관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진젠도르프가 구원을 받기 전에,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 화가는 자신이 그리기 원하는 예수님을 얼굴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인의 딸을 불러 그림 속의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그 사람은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미술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그 그림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그림을 그린 후에 그 소녀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그는 고통받는 사람처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 그림을 찢었습니다. 그는 세 번째로 그림을 그린 후에 그 소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이 그림은 예수님처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그 미술가는 이번에는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그렸다고 생각한 후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미술가가 그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진젠도르프가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진젠도르프는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자신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즉 원수조차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는 본질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예수님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8). 예수님은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그 분은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신 것입니다. 빛이 임할 때에 어두움이 떠나갑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의 영적이 어두움이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이때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빛은 그분의 제자들을 통하여 비추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아침에 태양이 뜰 때에,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빛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복음을 통하여 확장되어갈 때에 어두움의 권세는 물러가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9-11).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요일 1:9).

 

요한일서 29-11절은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이는 인격의 증거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중의 하나는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증오하는 것으로 현재형을 사용함으로써 습관적인 행동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미워하는 모습을 설명하며서, 그런 자는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미움과 사랑을 함께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나 자매에 대하여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분노는 곧 미움과 증오의 마음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이 미움이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무너지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습관적으로 미워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직 어두움에 있다는 것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미워하며 증오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의 증거입니다.

 

깊은 동굴 속에 사는 물고기는 오랫동안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기에 시력을 상실합니다. 미국의 테네시 주에 잃어버린 바다(Lost Sea)라는 곳에 가면 깊은 동굴이 있고 그 안에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에 사는 물고기는 살아 있지만 시력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즉 장님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동굴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기에 시력을 잃어버려 장님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이 계속해서 미움과 분노 속에 살아간다면 영적인 어두움에 갇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미움이 생기면 끝까지 복수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거듭난 사람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다른 지체들을 미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움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미워하는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을 너무 많이 하기도 하고, 너무 비판적이며, 어떤 사람들은 잘난체 하고, 어떤 사람은 나와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특별한 이유없이 미워하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10)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에 대하여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그는 빛 가운데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거듭났기에 다른 지체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순종함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에게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거리끼는 것은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빛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걷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만일 어두움에 걷는다면 넘어져 다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그 미움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미워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자신이 넘어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119:165)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넘치고 장애물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1)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첫째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아직 빛 가운데 거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인격은 행동을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재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셋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갈 곳을 알지 못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방향과 목적없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에 하나님의 빛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는 삶은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에 형제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한 학생이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무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걸어갔습니다. 그는 매주 무디 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몇 교회를 지나쳤습니다. 어느 주일에 한 사람이 그 소년이 교회를 지나쳐서 가는 것을 보고 그를 세워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어느 교회에 참석하니?” “네 저는 무디 교회에 갑니다.”“그래? 그 교회는 이곳에서 멀리 있는데 왜 그곳까지 걸어가니?” 그러자 그 소년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 제가 그 교회에 가는 이유는 그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나요? 여러분은 그들을 섬길만큼 그들을 사랑하나요? 여러분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만큼 사랑하는지요? 여러분은 그들의 짐을 질만큼 그들을 사랑하시나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관한 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은 이와같은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미움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며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도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죄에 빠질 수가 있지만, 만일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면 오랜기간 동안 미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오랜 기간 미워하는 사람은 그는 진정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거듭나는 은혜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주님께 기도함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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