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0) -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삼상 6:12).
사무엘상 5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아스돗에 가져가 다곤의 신당에 둔 이후에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곤 신상이 넘어지자 블레셋 사람이 다곤 신상을 바로 세웠지만, 다음 날에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진 상태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의 심판을 내리셔서 블레셋 사람들이 큰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찌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니.”(삼상 5:7). 블레셋 사람들은 아스돗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지만, 하나님은 가드성을 심판하심으로 그들의 교만과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사무엘상 6장은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삼상 6: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언약궤는 무척이나 소중한 기구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언약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평안과 승리의 보증수표와도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숭배하며 죄를 범하자,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영광을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잠시 옮기시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일곱 달이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는 일곱 달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독종으로 인하여 큰 재앙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사무엘 6장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땅을 떠나 이스라엘 지경으로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딜레마 (2-9).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 6:2).
하나님의 언약궤는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긴 후에, 가드론으로 옮겨졌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르는 곳마다 큰 재앙의 심판이 닥쳐왔습니다. 그들은 언약궤가 이르는 곳마다 큰 재앙이 닥치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책은 언약궤를 원래 있던 본처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 자손의 땅으로 보내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본래의 처서로 보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문제가 일어나면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 그리고 애그론으로 옮겼듯이, 피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 크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땅으로 가져온 후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이 자신들에게 부정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약궤를 원래의 자리로 옮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문제가 일어나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거하실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며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거하셔야 할 우리의 마음에 영광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삶에서 중심이 될 때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질문에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찌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삼상 6:3).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본래의 처소로 옮기려거든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속건제는 레위기에서도 가르치는 제사로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범했을 때에 배상하는 값을 치루고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속건죄를 드려야 자신들에게 일어난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드려야 할 속건제의 제물에 대하여 묻자, 그들은 말하기를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삼상 6:4). 블레셋 나라는 아스돗, 가드, 에그론, 가사, 아스글론의 다섯 도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무엘상 6장 17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죄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삼상 6:17).
블레셋 사람이 준비한 속건제의 제물은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었습니다. 금독종은 금으로 만든 독종으로서 종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의 몸에 종양이 생겨 큰 고통을 당하며 죽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금으로 쥐를 만들었습니다. 쥐가 블레셋 사람이 사는 집과 마을을 다니며 병균을 옮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독종과 쥐가 블레셋 사람의 땅을 해롭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독종과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가볍게 하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출애굽한 역사와 배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 사람과 바로와 같이 마음을 강팎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어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10가지 재앙을 만나 고통을 당한 후에야 보낸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애굽과 같이 강팎하게 하지 말고 언약궤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2. 블레셋이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보내다.
블레셋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새 수레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게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소가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은 소가 벧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오 우연히 만난 것인줄 알리라.”(삼상 6:9). 소는 젖을 먹이는 송아지가 있었고 아직 멍에를 매지 아니한 소였습니다. 이러한 소는 본능적으로 송아지와 떨어질 수 없어 수레를 끌지 않고 송아지에게 가려고 저항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멍에를 매지 아니하였기에 두 송아지가 함께 수레를 끌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적응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수레가 벧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지만, 이 소들이 벧세메스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거나 돌아오면 자신들이 당한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말대로 블레셋 사람들은 젖나는 소 둘을 끌어대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수레 위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금쥐와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함께 실었습니다. 이때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갈 때에 자기의 암소들로 인하여 울면서 갔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 까지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때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갔습니다.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이르자, 벧세메스 골짜기에서 밀을 베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때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인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자 섰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게 되렸습니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삼상 6:15).
레위 사람들은 큰 돌 위에 하나님의 궤와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두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번제와 다른 제를 드렸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이러한 것을 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무엘상은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아스돗과 가사,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위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상 6:17). 그리고 금쥐는 하나님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 속한 사람의 성읍의 수효대로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금쥐의 수효는 여러 성읍의 수까지 합했기에 더욱 많은 수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4.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영토인 벧세메스에 이르자 그 주민들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보았던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삼상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여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기에 그들 중에 오만칠십인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가 거룩했기에 항상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함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삼상 6:20).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에, 하나님을 자신들에게서 떠나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평소대로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기로 결단한다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삼상 6:21).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 여아림 사람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가져온 하나님의 언약궤를 그들에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칠개월 만에 돌아왔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의 영적인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왔을 때에 번제를 드려 그 분께 영광을 돌렸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했찌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 육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고, 그로 이하여 심판을 받자 회개하기 보다는 언약궤를 기럇 여아림으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고통당하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셔서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에 끌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셔서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자 바벨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하며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그 분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망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였지만 주님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녀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무엘과 같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벧세메스 사람처럼 하나님의 존재가 불편하게 여기는 육신적인 사람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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