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

사도바울강해(5) - 복음의 대가를 지불하라

비전의 사람 2012. 11. 2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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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강해(5) - 복음의 대가를 지불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우리는 구원받고 난 후에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까운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복음을 거절하며, 더 나아가 큰 핍박을 주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신앙생활을 하신 경험들이 있기도 하고, 지금도 그 어려움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의 대학 동기 중에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버님 제삿날에 부산의 집으로 내려갔는데, 제사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어머님께 혼나고 매를 맞았습니다. 대학생인데도 강한 어머님이 아들을 때려서 얼굴이 멍이 들은 것입니다. 어머님을 사랑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제사를 할 수 없었던 친구는 그 핍박을 견디어 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직장이나 가정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지요? 그러나, 우리가 외롭지 않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믿었던 사도 바울도 큰 고난을 이기며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돌아온 이후에, 그는 자신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고통스러운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그는 자신의 앞에 있을 시련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이 구원받고 변화되었을 때에,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 9:15-16).

 

아나니아는 주께로부터 받은 예언의 말씀을 바울에게 전했을 것이고, 바울은 앞으로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통의 시간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에 왔을 때에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했고, 예루살렘에 이르러서도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의 학자로서 율법을 가르칠 때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 큰 핍박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자, 그를 아는 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행 9:29). 이러한 죽이려는 음모는 바울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오히려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다가올 핍박과 시련과 비교했을 때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미약한 핍박이었습니다.

 

1) 바울은 핍박을 피하여 다소로 돌아가게 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소에 돌아갔을 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가 열심있는 유대인으로서 고향에 돌아갔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영향력에서 유대교의 학문과 전통을 배운 후에,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어릴 때 배운 텐트 만드는 일을 했고, 동시에 젊은 랍비로서 도시의 곳곳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사람들은 바울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헌신된 바리새인’ 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5). 바울은 12년에서 14년간을 랍비로 다소에서 지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에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승인했고 교회에 대한 핍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중에,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구원받게 되며, 삼년을 아라비아에서 보내고, 다메섹으로 돌아오며, 그 후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형제들이 그를 고향인 다소에 다시 보내게 됩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행 9:30). 바울은 다소에서 약 6년에서 8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그의 유대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지만, 그의 메시지는 헬라의 유대인들에게 거절된다는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을 떠나게 됩니다. 비록 바울은 큰 실망을 하게 되지만,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년 후에 바울이 선교여행으로부터 돌아온 후에 적대적인 군중들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하게 됩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행 22:18).

주님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명하실 때에, 바울은 실망하게 됩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학을 고쳐주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오게 하고자 하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행 22:19-20).

 

바울은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왜 자신이 변화를 받았는지에 대하여 강하게 설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과의 대화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자신의 복음에 대한 책임감을 표출했지만,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2:21). 바울을 향한 주님의 뜻은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시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느 곳 보다도 복음을 듣고 믿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셨으며, 그곳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베풀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충분한 기회를 얻었으며, 이제는 그 복음이 아직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이방인에게 바울을 통해서 전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은 다소에서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고향인 나사렛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자신을 이사야에서 예언된 기름부은 종임을 선포했을 때에 그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거절하였고, 더 나아가 절벽으로 밀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4). 바울이 다소에 돌아갔을 때에, 그도 이러한 거절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바울의 삶에서 현실화 되었습니다.

 

1) 바울은 부모로부터 거절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의 부모와 친척, 그리고 동료 랍비들은 바울의 변화로 인하여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젊은 청년이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전에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 였습니다. 그가 증오했던 예수님이 이제는 그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바울의 삶이 180%로 완전히 달라졌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다소에 왔을 때에 그의 부모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이 태어났을 때에, 그의 부모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8일만에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아버지의 무릎에서 유대인의 전통을 배웠고, 회당에서 토라를 배웠던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훌륭한 랍비가 되도록 당시에 가장 유명한 학자였던 가말리엘로부터 배우도록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냈던 부모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이 유대교의 믿음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지역사회에서의 수치와 당황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부모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되는 것은 헌신된 유대인으로서 두 가지의 선택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아들을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유대인 공동체에서 외면당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바울을 아들의 관계에서 끊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의 단절은 단지 관계 뿐만이 아니라, 재정적인 후원이나 상속에서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당시에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바울은 부모가 주는 상속에서도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모에게 다메섹에서의 구원의 경험을 나누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도함으로 부모님이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부모님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성경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아마도 그가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는 두려움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잇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3).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에는, 그에게는 부모님과 가까운 가족들을 향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2) 바울은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바울의 결혼은 어떠했나요? 바울은 아내가 있었나요? 어떤 학자들은 바울은 아내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헌신된 유대인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세 가지의 목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아버지는 아들이 구약의 법과 이스라엘의 전통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둘째, 아버지는 아들이 생활을 위한 기술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셋째, 아버지는 아들이 좋은 아내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분명이 이 세 가지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바울은 두 가지는 분명히 얻었습니다. 첫째, 바울은 유대교의 전통과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배웠고, 둘째로 바울은 텐트메이커로서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혼에 대해서는 어떠했나요?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 결혼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암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2-13, 15).

 

만일 바울이 아내가 있었다면, 그녀는 죽었든지, 아니면 남편이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복음을 믿기를 거절했든지 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죽었다면, 바울이 그녀를 언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의 아내는 아마도 결혼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지불해야 했던 가장 큰 대가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바울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서 핍박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가장 큰 고통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는 동료 랍비였지만, 이제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핍박자가 되었습니다.

 

1)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곳으로 유대인의 회당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 그가 가장 먼저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습니다. (행 9:20). 그가 아라비아에서 돌아와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회당에서 들어가 유대인들을 복음을 굴복시켰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도망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면서,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 시절에 지역별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점차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회당은 포로시절 성전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종교적인 모임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12명의 남자들이 모이게 되면, 그들은 지역별로 회당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모임을 가졌습니다. 다소와 같은 큰 도시는 여러 개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큰 도시에 많은 교회가 있듯이, 도시에 회당이 여러 개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의 임원들은 선출되어 지역회당을 관리하였으나, 가장 핵심적인 유대인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공식적인 랍비의 책임이자 특권이었습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아래서 학문을 배웠기에, 바울은 지역 회당에서 가르칠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소에 믿는자로 돌아왔지만, 그는 전에 유대교 랍비로서 가르쳤던 그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야임을 믿고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 바울은 육체적인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다음의 말씀은 바울 자신이 밝힌 핍박의 흔적들입니다.

 

먼저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언급한 고통은 다소에서의 개인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4). 이러한 매질은 회당에서 행하는 징계의 종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형벌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산헤드린의 회원들은 분노가 일어나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행 5:33). 이때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이 동료들에게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말도록 권면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로서 형벌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 5:40).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형벌은 신명기 25장 2절에서 언급된 죄수들을 위한 형벌에 기초합니다.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찌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신 25:2-3). 사십의 태형은 특정한 범죄에 부과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이러한 태형을 회당의 법에 저촉된 자에게 주는 형벌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율법주의로 인하여, 그들은 태형의 숫자를 서른아홉으로 줄였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나 자신들이 셈을 잘못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태형은 무척이나 잔인한 형벌이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자들에게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형벌로 사람들은 죽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태형을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기를 거부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한 회당에서 출당을 당하면, 그는 다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의 소망은 듣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한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으며,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을 간증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몸은 이러한 태형의 상처가 평생 남았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매를 심하게 맞아서 장애의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같이 즐거워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우리는 이러한 핍박을 받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헌신된 이러한 열정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은 세 번이나 파선하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도 다소에서의 시간동안 일어났으리라 추측합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출당된 후에, 그는 해변가로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텐트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목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셋째,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소에 머무는 동안 일어났던 일을 고린도후서에서 간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고후 12:2). 이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특히 14년 전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시기가 A.D. 55-57년 사이이기에, 그의 경험은 A.D. 41 -43년 사이입니다. 이는 바울이 다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주님과 함께 했던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경험을 무척이나 신비롭게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이 몸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지극히 놀랍고 특별한 경험이기에, 하나님은 그의 육체에 사탄의 사자인 가시를 주셨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7). 비록 바울이 몸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갔음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 셋째하늘(12:2) 또는 낙원(12:3)은 아마도 하나님이 천사와 믿음안에서 죽은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받은 메시지는 너무나 영광스러워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바울의 경험이 놀랍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이는 사단의 사자였으며, 바울로 하여금 겸손하도록 하는 도구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로서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9).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시를 허락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가시가 무엇인지를 추측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안질과 같은 육체의 연약함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감정적인 어려움이라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찾아오는 유혹이라고도 추측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바울에게는 심각한 고통을 주는 가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시로 인하여 이렇게 간증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에게 찾아오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실망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4. 바울이 당하는 거절과 핍박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따라서 자신의 믿음을 언급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라서 순종하였고,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오는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다음의 원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어려움을 만날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어려운 상대가 부모님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배우자, 그리고 친구의 반대가 있을 때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보임으로써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5).

 

2)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누리도록 대가를 지불한 그리스도인의 희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로 인하여 그 은혜를 당연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에게 복음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동료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신약에서 13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다섯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죄로 인하여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역사는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직후에 네로에 의하여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구원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큰 대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같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약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쉽게 읽도록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17개월을 보내고 화형을 당하여 순교했는데, 그의 마지막 기도는 “주님, 영국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였습니다. 틴데일의 기도와 죽음의 씨앗으로, 마침내 성경이 영어로 번역이 되어 출판되었고, 결국은 킹 제임스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도록 함으로 킹제임스 성경이 완간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역의 뒤에는 틴데일의 강한 믿음과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침례교인은 암흑의 12세기 동안 오천만명 이상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과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타협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큰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불해야 할 대가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감당함으로 인한 영광스러운 생명의 열매를 가치있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교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바울은 전에는 핍박하는 자였지만, 이제는 사도와 복음 전도자로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하였습니다. 그의 희생과 헌신은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열매를 낳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대가를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때로는 핍박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생은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과는 비교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생각하며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으며, 지금도 많은 핍박 가운데 살아가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슬람의 나라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순교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나이지라아 같은 나라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함께 공존하는데, 최근에도 교회가 방화로 무너지거나 성도들이 테러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1-4).

 

하나님은 우리가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기도도 하고 복음을 전하며,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부의 간섭이나 핍박이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큰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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