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올무에서 벗어나라.

비전의 사람 2024. 12. 14. 17:37

올무에서 벗어나라.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124:7-8).

 

우리는 어렸을 때에 올무를 놓아 새를 잡곤 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새를 잡기 위하여 올무를 만들고 그 올무안에 새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놓아서 새가 다가오면 올무에 걸리도록 줄을 잡아당기곤 했습니다. 때로는 그물을 참새들이 있는 곳에 놓아두면 새들이 그물에 걸려서 잡곤 했습니다. 그물에 걸린 참새는 나올 수 없고 사냥꾼의 밥이 되어 희생당할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들이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올무에 갇힌 새에 배유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음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올무가 끊어지므로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새가 올무에 갇히게 되면 사냥꾼의 손에 붙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새는 올무인줄을 모르고 그곳에 앉았다가 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새가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자신들의 영혼이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새는 스스로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와 올무에서 새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124:7-8). 시편 기자는 자신들의 영혼을 위하여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연약한 자신을 새로 비유하고 있고, 사냥군은 블레셋과 같은 강한 군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사냥군은 마귀로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통하여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딤후 2:26)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징계를 받고 회개하게 되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난 그 영혼은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통하여 감독의 자격으로는 새신자를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해질 수 있고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 3:7).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목회자라도 마귀의 올무에 빠질수 있다면, 우리 모두도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스스로 빠져 나올수 없고 오직 목자의 지팡이의 도움으로 구덩이에서 나올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영혼이 올무에 빠지게 된다면, 그 올무에서 나올수 있도록 도우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이 올무에 빠져서 영적 절름발이로 살아간다면,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날아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 듯이 우리의 영혼이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벗어나야 할 올무가 무엇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염려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1-32).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카고 러쉬대학교 메디컬 센터에서는 65세 이상의 노인 1064명을 대상으로 걱정 및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조사한 후 3년부터 6년이 경과된 시점에 이들 중에서 누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걱정이 많고 스트레스에 민감한 사람들일수록 노년기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위험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염려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찾아오는 마음의 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한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한계가 도전을 받거나 위협을 느끼게 되면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의 염려는 질병의 염려에서부터 자녀의 미래, 재정적인 고통과 관계에서 찾아오는 어려움 등과 같이 다양하게 찾아오게 됩니다.

 

최근에는 우리에게도 계엄으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큰 혼돈에 빠짐으로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각 나라들의 전쟁이나 자연 재해로부터 찾아오는 염려 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안전하지 못하고 불확실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니는 거리에는 cctv 가 설치되어 있고, 차량에는 블랙박스가 있습니다. 자녀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있어서 항상 연락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안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무척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습니다.

 

염려는 아담 이후로 모든 세대에 걸쳐 내려온 인생의 굴레와도 같습니다. 아담의 죄 이후로 사람은 땀을 흘리는 일을 하며 양식을 구해야 했고, 죄로 인하여 깨어진 세상은 죄와 질병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염려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를 하나님은 미리 아시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며, 우리를 자녀와 같이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염려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만일 염려가 찾아와서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모든 기쁨과 평안을 앗아가며 심지어는 믿음까지도 빼앗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염려와 믿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대학의 심리학팀이 염려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그 조사결과를 보면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고, 10%는 병에 관한 걱정거리였습니다. 진짜로 걱정할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8% 중에서도 정말로 걱정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걱정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염려의 마음이 커지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두려움은 사람의 기능을 마비시키게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냥꾼이 밤에 사슴을 만나면 후레쉬 불을 얼굴에 대면 두려워서 꼼짝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 사냥꾼이 사슴을 사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놀란 사슴이 순간적으로 온 몸이 마비가 되는 것입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영적인 삶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육체에 질병도 가져오기도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17:22). 마음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함같이 육체에 질병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막히게 되고 결국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 근심으로 빠지게 됩니다. 염려는 올무입니다. 염려는 두려움의 통로가 되기에, 염려의 마음이 찾아오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염려의 올무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환경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세상을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염려의 올무에서 벗어나 영혼의 자유함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낙심의 올무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5).

 

태국에서 코끼리를 훈련하는 모습입니다. 사냥꾼들이 야생 코끼리를 잡아다가 쇠사슬 줄에 매여 나무에 묶어 둡니다. 처음에는 코끼리가 며칠 또는 몇 주일간 발에 묶인 쇠사슬을 끌면서 나무를 뽑으려고 힘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코끼리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나무를 뽑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발에 묶인 쇠사슬이 팽팽하게만 되면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코끼리를 약한 줄로 묶어 두어도 더 이상 나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큰 힘이 있지만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부터 조련사들이 코끼리를 훈련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포기하고 그냥 조련사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코끼리와 같이 우리도 때로는 스스로 절망하며 웅크리고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낙심은 마음의 절망을 의미합니다. 절망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기에 낙심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윗은 마음이 낙심하고 절망할 때에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42:6). 다윗은 시편을 통하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된다고 했습니다. 낙망이 되는 것은 깊은 낙심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왕으로부터 쫓기는 과정에서 도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비관적입니다.

 

더욱 다윗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비방인 것입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42:10). 다윗이 찬양하고 의존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가 자신의 힘이요 능력이라고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순간에 다윗은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편 43편에서는 그의 절망이 더욱 커져 갑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43:2)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절망에서 다윗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외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너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3:5). 다윗은 스스로를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서게 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낙심하여 무당에게 찾아가면서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낙심과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불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바알 선지자와 싸워서 영적인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후에 이세벨의 위협이 찾아오자 크게 낙심합니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죽기를 구하게 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열상 19:4). 엘리야 선지자는 낙심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으로 그 분의 임재를 보이시며 불로도 보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자신이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절망감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신의 생명까지 찾고 있으니 너무나 절망이 찾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열상 19:14).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사역을 명령하시며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듣고 엘리야 선지자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도 낙심은 찾아옵니다.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당할 때 낙심이 찾아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때에 낙심이 찾아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창고에 곡식이 부족하면 낙심이 찾아옵니다. 건강의 위기가 찾아오면 낙심이 됩니다. 신뢰했던 사람을 향하여 실망하면 낙심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역을 하지만 그 열매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의 덫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으로 낙심을 극복하고 주의 일에 수고하고 진력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 4:10). 사도 바울은 주께서 자기 곁에 서서 강건케 하심으로 지속적으로 전도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딤후 4:17).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 주님의 강건케 하시는 은혜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강건하시는 힘을 얻어서 새 힘을 얻어 이사야 선지야의 고백처럼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상처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2:15).

 

상처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마음의 흔적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목포에 처음 사역을 하면서 사역자가 상처에 대하여 말을 할 때에 저는 마음의 상처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마치 온실에서 자란 나무같이 큰 어려움없이 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적인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왔지만 마음의 깊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경험을 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목회자로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면서 마음의 깊은 상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해를 넘어서 저 자신이 마음의 깊은 곳에서 피를 흘리는 아픔을 겪으면서 상처의 의미를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사회는 상처를 주고 받아 아픔이 많이 있습니다. 어릴 때의 상처가 청소년기의 폭력과 분노로 나타나기도 하고 성인이 되어도 치유받지 못한 상처가 자신과 타인에게 큰 아픔을 주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17년의 조선일보 기사에 아버지와 아들 정신과 의사인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무석, 이인수 박사는 의사로서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 분들은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합니다. 해정이라는 동생이 미국 유학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공황발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검사를 해보니 분리불안이라고 하는 것인데, 부모님과 떨어지게 되자 발작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녀에게는 오빠가 있었는데 말썽을 자주 부려 부모님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분리불안의 마음의 생긴 것입니다. “나도 잘못하면 부모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는 한국 문화가 만들어내는 상처와 두려움의 사회 현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인수 교수는 말하기를 한국 사회가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면서 모두가 경쟁자가 되어 타인에게 공감할 여유가 없이 살아간다고 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약한 사람이나 아랫 사람에게 풀고, 자해를 하거나 남을 학대하면서 그 분노를 푼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여중생들이 다른 여중생을 심하게 구타한 적이 있었는데, 가해자인 여중생들도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았거나 학대당한 경험이 었어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을 찾아 괴롭히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착각에 빠졌을 거라고 추측을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까라는 두려움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받는 사람은 인정받는 사람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또 그들대로 속으로 피 흘리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사람들이 원하는 성공을 향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분노가 인터넷 댓글에서 욕설과 험담, 남을 향한 비난으로 푸는 것은 우리 사회가 멍들고 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 교수는 말하기를 다섯 살까지의 관계와 경험이 삶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때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중요하고 그들의 모습이 인정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상처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쓴뿌리로 자라서 분노와 절망감으로 자신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상처가 쓴뿌리가 되는 것이며, 그 쓴뿌리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와 쓴뿌리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는 길입니다. 가장 힘든 고통중의 하나는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거나 분노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는 영혼을 어둡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4)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상처로 인하여 마음의 아픔이 찾아옵니다.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분노 속에는 사탄의 덫이 마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함으로 상처와 쓴 뿌리의 올무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혼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상처를 용서의 미덕으로 승화하는 자입니다. 요셉이 자신에게 큰 해를 끼친 형들을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큰 뜻을 성취하게 됩니다. 만일 요셉이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형들과 그 가족들을 애굽에서 추방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세워져야 하는 400 년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과 그들의 가족을 추방했다면 모세의 출애굽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상처입은 치유자이신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상처입니다.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의 상처인 것입니다. 그 상처난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얻게 했습니다. 상처와 쓴뿌리는 영혼의 올무입니다. 우리는 올무에 갇혀서 좌절과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를 묵상하며 은혜의 강가에서 상처와 분노와 쓴뿌리를 용서를 통하여 날려버리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4.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32:5).

 

다윗은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왕이 된 후에 영적으로 나태해집니다. 그러자, 그는 밧세바와 간음하였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하여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게 됩니다. 그는 그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까지 마음의 큰 고통을 당한 장면이 시편 32편과 51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32:3-4). 신음하는 것은 짐승의 고함치는 소리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죄를 고백하지 아니하고 숨겼을 때 가장 먼저 양심의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 짐승이 울부짖듯이 소리지르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상태를 표현할 것입니다. 그는 나단이 방문하여 자신의 죄를 지적하기까지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마음과 육체의 심한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누름으로 인하여 자신의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손이 양심과 영혼을 누름으로 인하여 다윗은 피가 마르는 마음과 육체의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고통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32:4-5). 다윗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은혜에 기뻐하며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6).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난 기회를 얻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가 찾아옴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기쁨을 회복하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0-12).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자는 다윗과 같이 깨끗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회복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즐거움과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죄는 사탄이 주는 올무입니다. 사탄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죄의 덫에 걸리게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죄의 덫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덫에 걸려서 넘어지고 헤어나오지 못하면 하나님의 누르시는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은 양심과 영혼을 누르며 몸의 진액이 쇠하는 큰 고통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의 덫에서 건져주십니다. 우리가 죄의 덫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고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에 붙들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올무가 끊어지므로 벗어났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124:7-8). 우리가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마음과 영혼을 포로가 되게 하는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귀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