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코이노니아의 해를 위한 결단

비전의 사람 2026. 1. 3. 22:17

코이노니아의 해를 위한 결단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3-4).

 

2026년을 우리 교회는 코이노니아의 해로 정했습니다. 이는 코이노니아를 세우는 해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의 뜻은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한 몸을 이루어 가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는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함께 세워가야 하는가요? 우리는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질문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얼마만큼 코이노니아에 참여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사를 하빈다. 매주 같은 건물 안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지만, 우리는 얼마 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가요? 어찌보면 가장 가까운 만남이지만 마음은 멀어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오늘 저는 2가지의 질문으로 코이노니아의 해를 세우는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 왜 우리는 주 안에서 코이노니아에 참여해야 할까요?

 

우리가 코이노니아에 참여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주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코이노나아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이 코이노니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17:21).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인격이십니다. 그 분은 온전한 연합을 이루시는 코이노니아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서로 반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 하나님이 순종하시고, 성령께서는 아들의 사역을 도우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코이노니아의 본질은 사랑이신 하나님과 같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 결핍된 공동체에서는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시기에, 그 분 안에서는 연합과 질서, 의와 평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코이노니아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코이노니아가 가족에게 행복과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코이노니아는 서로에게 힘과 격려를 가져다 줍니다. 국가에서의 코이노니아는 모두가 서로를 신뢰하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는 지체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며 격려하는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물이 코이노니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1:31).

 

하나님의 창조물은 그 분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피조물은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온 세상의 피조물은 그 안에서 하나됨과 다양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양과 달과 별은 그 존재로서 빛이 나지만,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빛과 열을 내며 낮의 질서를 세웁니다. 달은 태양빛을 반사해 밤을 밝힙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기에,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입니다. 별은 어둠 속에서도 방향과 계절을 알게 합니다.

 

별자리는 계절마다 위치가 달라집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1년 주기로 공전하기 때문에, 밤하늘에서 보이는 별들의 위치와 별자리가 계절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봄에 잘 보이는 별자리가 있고, 여름에 잘 보이는 별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옛 사람들은 별 자리를 보고 계절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별을 보고 추위와 더위, 추수의 때르를 이해했습니다. 창세기 114절은 태양과 달, 별이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의 위치와 역할이 있었듯이, 교회 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연은 생태계의 먹이그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종의 변화가 다른 종과 환경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곤충이 줄면 꽃가루받이가 약해지고, 꽃이 줄면 열매가 줄고, 열매가 줄면 새와 동물이 줄고, 토양과 물의 순환까지 흔들리게 됩니다. 이는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근에 벌이 줄면서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뉴스가 종종 나옵니다. 꿀벌이 꿀을 얻기 위해 꽃을 방문하지만, 그 과정에서 꽃가루를 옮겨 식물의 번식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사과나무는 그 자체로 번식하기 어렵지만, 꿀벌이 전달한 꽃가루로 인하여 수정이 되어 사과의 씨를 만들고 , 열매를 만들어 식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열매가 맺히고, 인간과 동물이 먹고, 숲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즉 생태계는 서로를 지켜지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낙엽과 사체는 그대로 쌓여 있지 않습니다. 미생물과 곰팡이가 분해하여 영양분을 토양으로 돌려 보내어, 다른 생명체가 성장하는 영양분이 되게 합니다. 자신의 그 영양분으로 성장한 후에, 그가 죽으면 다른 나무를 위해서 자신이 영양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습지와 갯벌의 역할이 바다의 더러움을 정화하는 역할을 알고 있습니다. 강에서 내려온 물이나 바닷물이 습지와 갯벌을 지나갈 때에, 습지 식물의 뿌리들이 오염 성분을 먹거나 빨아 들입니다. 그리고 습지와 갯벌의 미생물이 오염된 물질이나 독성을 먹이로 먹으면서 분해시킵니다.

 

그 결과로 바다의 물이 정화되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습지와 갯벌은 식물과 미생물들이 협력하여 오염을 붙잡고 분해하여 다시 생명이 살수 있게 하는 자연의 자정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것이 코이노니아로 서로 협력하여 생태계가 회복하과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코이노니아도 서로 협력하여 세워주고 붙들어 주며, 용기를 주어 함께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교회를 그 분의 코이노니아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3-4).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함께 코이노니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여 우리의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소명인데, 그 소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코이노니아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영으로 코이노니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찬양과 말씀,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기에, 그 분의 임재 가운데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이 주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이며,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코이노니아는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을 가져다 주는 은혜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은 그 분과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삭개오가 구원을 받아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코이노니아 거했던 나사로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했고, 세리였던 마태가 주님의 제자로 쓰임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코이노나아에 거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과의 코이노니아는 그 분과의 만남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켜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지체들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며 살아가게 합니다.

 

II.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길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요일 1:3).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주님과의 교제가 흘러가서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는 그 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 짐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부르심은 그 분과의 친밀한 교제가 흘러가서 주님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들의 연합이듯이, 몸을 이루는 우리는 영적인 연합으로 그 분의 몸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는 어떻게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모습을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찾고자 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2:42).

 

첫째, 코이노니아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2:42).

 

코이노니아의 핵심은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의 창조물이 자기의 존재감을 창조의 목적에 참여함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태양이 빛을 내고,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바다에서 뛰어 놉니다. 나무가 푸르른 입을 내며 열매를 맺어 가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는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는 구원을 받은 후에 한 일은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참여했고, 교제에 참여했고,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참여하며 주님이 주신 은혜에 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2:46).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며 교회의 예배와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로마서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고 했습니다.

 

우리가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 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코이노니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코이노니아는 교제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2:42). 교제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교제는 주님 안에서 지체들과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교제는 단지 친목 모임이 아닙니다.

 

친목 모임은 사람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는 것은 파당을 이루는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중심이 되고, 말씀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교제는 말씀으로 나눌 뿐 아니라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진설병 떡을 먹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이 말씀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코이노니아는 나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2:4-45). 코이노니아는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은 어려울 때에 도우며 격려하여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영적인 가족에서도 지체가 어려움에 있다면, 모두가 힘을 내어 도우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성경적인 가치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나누는 삶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둥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19:9-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서로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희년인 50년 마다 모든 노예들을 자유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산 토지도 다시 원 주인에게 돌려주어 서로 나누는 삶을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방인 교회로부터 구제 헌금을 받아 전달했습니다. 이는 물질의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주님의 나라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코이노니아는 동역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5:42). 하나님의 부르심은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성숙한 코이노니아는 교제를 넘어 사역에 참여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사역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참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으로서 동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역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지체들이 연합하여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사역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특징은 전 성도가 함께 사역에 참여하고, 전도에 참여하며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올 해는 우리가 함께 복음의 사역을 전 성도가 동역자가 되어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며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은 다르지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셔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 몸의 각 지체는 각자의 역할을 합니다. 몸의 한 지체도 살아서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 우리가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합니다.

 

우리가 작년에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해서 배운 핵심 진리는 교회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참여와 교제, 그리고 나눔과 동역으로 한 몸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전제가 고린도전서 110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우리 교회의 코이노니아를 위한 우리의 결단이 무엇인가요? 한 몸된 지체로서 우리의 존재감은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 깊이 묵상하며 믿음의 결단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