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시리즈(3) - 코이노니아가 주는 형통의 삶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구약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과 연관되어 나오는 단어가 형통입니다. 형통이라고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져서 아무 근심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칫 형통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형통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거나 성경에서 나오는 요셉이나 다윗과 같은 큰 믿음을 가진 거장에게나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 속에 갇혀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의 은혜를 잊거나 감사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무엇인가요? 형통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애를 뚫고 전진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형통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상황을 지혜롭게 분별하여 행하게 됨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전진하기 때문입니다.
형통에 대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의 삶을 살아갔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수 많은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이기며 지금까지 살아온 자체가 형통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형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성경에서 가르치는 코이노니아와 형통의 관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형통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성경은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애굽에서 존귀한 자가 되고 세상을 기근에서 구원한 자는 측면만 보면 누구나 요셉의 형통을 인정하거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후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같혀 고난 당할 때의 모습을 본다면 어느 누구도 그의 인생을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하거나 찾아오거나 격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새의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여 신음하는 상처 입고 무리에서 이탈한 자라 간주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요셉이 노예로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상황이 있었지만, 성경은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억울하게 갇혀서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요셉을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나요? 성경은 요셉이 가장 어두운 밤에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사람은 형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인생에서 장애를 만나거나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은혜로 계속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진의 방향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형통의 이유를 요셉이 만나야 했던 참혹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갈 때에도 성경은 그가 형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가 형통한 자라고 했고,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가 형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형통의 조건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에 달려있지, 상황이나 환경이 좋아졌느냐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인생에서 어떠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형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노예의 자리에 있어도 성실과 정직으로 최선을 다하며, 유혹이 찾아오자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 없음을 선포하며 거룩과 순결을 지키는 자입니다. 감옥에서도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아가며, 권력의 자리에 올라도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형통한 이유는 그가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뛰어난 영으로 살아가는 자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차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매사에 정직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가기에 원수라도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요셉은 노예로 있을 때에는 보디발의 신뢰를 얻었고, 감옥에서는 간수장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앞에 섰을 때는 바로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5-6)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은혜를 얻게 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셧듯이, 우리의 삶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형통한 이유는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로 함께 하는 삶은 형통한 삶의 비결인 것입니다.
2. 말씀의 코이노니아로 살아가는 자가 형통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2-3).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형통의 근원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과 교제를 나누는 삶으로 말씀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형통한 삶은 단지 말씀을 읽는 삶을 뛰어 넘어,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에 따르며 살아가는 것이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형통케 하는 이유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의 말씀과 같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삶은 말씀이 지혜와 명철을 얻게 함으로 항상 바른 길을 보고 걷게 합니다.
수요일에 저희는 잠언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잠언 1장에서 잠언의 말씀은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명철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통찰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과 지혜, 그리고 명철을 얻게 함으로 삶에서 형통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잠언은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 1:5)고 했습니다. 모략은 지략으로서 항해술에서 유래했습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망망 대해에서 목적지로 배를 인도하는 조종 기술입니다.
이 모략을 인생에 비유하면 복잡한 삶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지혜입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과 환난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말씀과 코이노나이를 이루는 삶은 말씀에서 길을 보여주는 대로 삶을 항해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거나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인생에서 갑자기 풍랑이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로서 채색옷을 입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소유한 자로서 형제들로부터 꿈꾸는 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의 삶에 찾아온 것은 쓰라린 고통과 아픔이었습니다. 형제들의 배신으로 먼 나라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형제들이 은 이십에 팔아넘긴 그 값에 요셉은 아무 죄가 없이 착고에 매여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생활하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다시 큰 위기가 찿아왔습니다. 이때 요셉의 중심을 잡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요셉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이 중심에 계셨습니다. 요셉의 삶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형통한 삶을 살아갔던 비결이었습니다.
형통의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말씀이 중심이 되어 살아갑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끌려가 바베론 궁전에서 교육을 받을 때에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던 믿음의 결단은 그가 바벨론에서 형통한 삶을 살게 했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말씀과의 코이노니아가 형통한 삶의 비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지혜는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길이 평탄하며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가뭄과 같은 외부의 환경을 극복하고 자라가는 비결은 나무의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땅속에서 수분과 양분을 땅에서 흡수하여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 공급합니다. 나무가 뿌리와 연합되어 있다면 어떠한 환경에도 안전합니다. 그리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풍성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영적인 삶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과 함께 코이노니아를 이루여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은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하며 명철하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에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을 얻게 함으로 지략으로 삶을 목적지로 항해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넘어지거나 실패할 수 있지만, 말씀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말씀의 지혜를 얻게 한다면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형통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형통이란 말은 우리가 사모해야 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고, 말씀과 코이노니아로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의 삶을 감으로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형통 앞에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의 형통은 무엇을 위한 형통인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형통하게 하셔야 하는가?
우리는 잠시 창세기에서 가르치는 요셉의 형통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2).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형통케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요셉이 총리가 되어 개인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이유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기근에서 생명을 지켜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70명에서 300만 명이상의 큰 민족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형통케 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자신에게 찾아온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하셨습니다. 요셉의 형통의 이유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형통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형통케 하는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 형통이 흘러가게 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의 집이 큰 복을 받았습니다. “...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후에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을 구하기 전에, 내가 형통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의 형통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 형통은 부패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형통이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형통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형통의 이유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하늘의 별과 같이 후손이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셔서 나라가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그의 후손들이 왕이 되게 하시고, 그의 혈통을 따라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 자손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살아가던 시대를 담고 있습니다. 페르시아는 오늘날 이란 나라입니다. 에스더는 고아로 자라며 삼촌인 모르드개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고아로 자라던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되는 형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되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영향력으로 하만이 유대인 모두를 학살하려고 할 때에, 그 정책을 바꾸고 도리어 하만을 장대에 매달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라고 했습니다. 왕후라는 큰 형통의 축복을 얻은 이유는 유대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 유다인의 생명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어 거룩함에 이르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유익을 구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형통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원리는 우리를 축복하심으로 다른 사람의 축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부르심과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엡 2:8,10).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아 새롭게 된 우리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나의 형통을 통하여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나의 형통의 은혜는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에게 멈추어 있는가?‘ ’나의 형통의 뿌리가 하나님과 말씀 안에 깊이 뿌리내리어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형통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에서 흘러나오는 열매 임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과의 코이노니아는 말씀에 뿌리를 내림으로 지혜와 명철을 얻어 어떠한 시련과 고난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길을 찾아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형통의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은 더욱 풍성한 삶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가 단지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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