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비전의 사람 2014. 5. 24. 13:14

사랑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성공과 행복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하바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지난 72 년 간의 하버드생들의 일생을 추적했습니다. 그는 1937 년 하버드 의대 교수 알리 복 (Bock) 하버드대 2학년생 268 명 생애 연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이 사람으로 성공하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가? 최고의 엘리트 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연구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는 각자 사람들을 연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하게 늙어가는 여러 요인들을 분석했습니다. 그 중에는 교육, 안정적 결혼, 금연, 금주, 운동, 적당한 체중, 그리고,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 그러나,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 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연구를 통하여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형제, 자매 관계도 중요하다. 65 세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93 % 가 이제에 형제, 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의 행복의 열쇠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시대와 문화가 변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한가지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비결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우리가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서로 사랑하는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 5)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을 영어 성경은 rude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Rude 는 거만하거나 건방지게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표현은 상대에게 무례하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우리의 감정에 이끌려서 상대에게 무례하게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리의 톤을 높여서 소리를 지를 때도 있고, 다른 사람앞에서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하는 사소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례히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진실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사연을 듣기 전에 먼저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무례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18: 13). 영어 성경은 듣기 전에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례하다.’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하며 존중한다면, 자녀들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을 더욱 존중하게 되는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화의 표현에서 충분한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대화를 할 것이며, 그리고 상대의 소리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겸손하게 대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말씀이 에베소서 431- 32 저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 31-32).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배우자와 가족을 향하여 사랑의 표현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랑의 태도는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왕 앞에선 신하와 같, 그리고 기사가 숙녀 앞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듯이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사람은 악독 (bitterness)과 분냄 (angry) 과 떠드는 것 (mad) 과 훼방하는 것 (yell at one another or curse each other or ever be rude) 을 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상대를 향하여 용서하며 긍휼의 마음으로 친절하게 (nice)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 5)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agape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내어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진정한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유익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셨고,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있다면, 인간의 죄를 대속할 보혈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없는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실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존귀한 분이시기에, 인간들로부터 존귀와 예우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영광을 단 1 분만 보인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그 분 앞에 엎드려 경배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에 동방 박사들이 와서 그 분께 경배하고 소중한 예물을 드렸던 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고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 재물로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겸손의 옷을 입으시고 종이 되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온전히 섬기시다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분이셨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서로에게 관용하고 온유함으로 친절하다면, 얼마나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겠는지요? 우리의 행복은 사랑하는 삶이 될 때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섬기려고 할 때에 더욱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6: 31). 우리의 가치도 이제는 성숙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고 싶은 사랑과 존경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친절하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갈망이 있는만큼,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채워지지 않는 욕구 불만을 가지고, 배우자나 교회의 공동체에 불평과 원망으로 표현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서 우리가 받고 싶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랑은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 5)

 

성경은 사랑은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화난 감정을 절제하고, 그 분노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입니다. 잠언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 32).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절제된 마음이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절제된 감정의 표현으로 나타날 때에 좋은 관계를 맺는 연결 고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절제된 감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6: 1).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우리의 반응은 정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가 바로 세워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분노를 품고 정죄하는 것은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사람은 온유한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러한 자를 용서함으로 품어야 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3: 13). 우리는 용서함으로 마음의 분노를 절제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분노를 내게 하는 일이 있습니까? 마음에 온유함을 잊지 말고 그러한 자를 용서하고 말씀으로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13). 로마서 기자는 우리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10: 4). 직장에서 권위자가 분을 내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이 화를 내거나 직장을 그만두거나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반응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상사가 분을 일으키면,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큰 허물이 경감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에서 권위자를 세우셨다면, 우리는 권위자를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는 책망을 받을 때도 있고 칭찬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책망을 받을 때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일 때에 실수와 허물이 가리우게 되고 오히려 겸손한 모습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4.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 5)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행한 죄와 허물에 대하여 마음속에 기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삭제를 합니다.

 

우리는 배우자가 준 깊은 상처를 생각하면서 평생 원망하면서 살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교회의 지체 중에서나, 직장의 상사나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꾸만 꺼내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고 마음에서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오면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11: 25).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합니까? 사랑은 허물을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0: 12).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마음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품고는 허물을 가리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툼을 일으켜 분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79절에서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사랑은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허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친구를 이간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는 것은 험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거듭 말하면서 험담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8: 11).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품어주는 은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5. 사랑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 6).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삶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사탄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그 후에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을까요? 하와가 선악과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요청 때문에,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 선악과를 취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로서 함께 불의와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들은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고 물으시자, 그들은 대답합니다. 아담은 아내를 탓하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 12). 그들은 불의와 타협을 한 후에, 그 후에는 자신들이 불행을 상대에게 탓하면서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불의를 기뻐하였다가, 그 결과로 사랑에 틈이 생긴 것을 보게 됩니다. 틈이 생긴 공간으로 사탄은 침투하여 그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불의는 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허용하지 않으시며, 그 죄를 행하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사랑도 죄를 허용하지 않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겠습니까? 어느 아내가 남편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겠습니까? 혹시 세상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불의를 행하려고 할 때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불의를 제지하고, 진리를 행하도록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타협하기 쉬운 삶의 요건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쉽게 타협하기 쉬운 삶의 요소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 13).

 

욥이 극한 상황에서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그의 재산을 잃게 됩니다. 스바 사람이 와서 종들을 죽이고 소를 빼앗아 갔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과 종들이 불살라 죽게 되며, 갈대아 사람들이 찾아와서 약대를 탈취해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자녀들이 식사를 하다가 집이 무너져 모두가 죽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는데, 악창이 온 몸에 나서 고통 가운데 있게 됩니다. 욥은 기와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으며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평소에 욥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내의 마음이 급격하게 변하게 됩니다. 욥의 아내는 욥과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나가기 보다는 마음의 실망과 좌절감으로, 욥을 향하여 독설을 품어 내고 있었습니다. “...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2: 9). 욥의 아내는 삶의 환경이 어려워지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남편을 통하여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신실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게 보이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남편에게 독설로서 공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욥은 깊은 영성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게 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2: 10). 욥은 자신의 아내를 책망합니다. 아내의 불의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책망하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게 됩니다. 욥은 고통 가운데서도 재앙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욥은 시험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사랑과 믿음을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불의에 굴복하게 하려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더욱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와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향하여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부의 삶을 파괴하는 최고의 암세포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어려운 환경에서 서로를 의지하기 보다는, 서로를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원망은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와 같이, 부부의 관계를 허물어서 삶에 큰 어려움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사랑으로 이겨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담아서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성의 유혹을 만났을 때입니다.

 

사랑은 고귀한 가치를 상대에게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의미는 최고의 가치와 마음으로 상대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향한 참된 사랑이란 한결같이 상대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좌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어려움 속에서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게 됩니다. 주인의 아내로부터 찾아오는 유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오다가, 어느 날은 요셉의 옷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때 요셉은 옷을 벗어 버리고 그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불의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는 그 주인에게 속한 여인임을 인정하였고, 불같이 찾아오는 유혹을 뿌리치고 이겨냈습니다. 요셉이 이성의 유혹을 뿌리치는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믿음을 향한 도전이 찾아올 때입니다.

“...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1: 3).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복음과 믿음의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확신을 지켜 나가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타협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복음의 능력을 입을 때에 더욱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복음이 타협되지 않고, 주님이 전수해 주신 순수한 복음을 우리는 지키며 전파해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향한 믿음을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그 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함께 세워나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서침례교회로서의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진리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원리를 지켜 나가는 것이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믿음과 교리가 타협이 되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 5).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사랑의 동력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사랑을 위한 동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수한 사랑을 위해서, 진리가 우리 안에서 기뻐하며 역사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는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째,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7: 17). 우리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기뻐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풍성한 은혜를 주시며 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며 지키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 17-18).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의 말씀을 기뻐하는 마음이 될 때는, 사랑의 마음이 풍성히 흘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기쁨과 사랑의 마음으로 풍성한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진리는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어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 26).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둠의 영은 우리를 어둠의 죄악으로 인도하여 파멸의 길로 인도하지만, 진리의 영은 우리를 거룩함과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기뻐하며 그 분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패하여 타락의 길로 가기 쉬운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실 때에 우리는 날마다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서 기뻐하는 원리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께 날마다 순종하며 기도와 말씀 중심의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령님을 기뻐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7. 사랑은 은혜로서 인내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 7).

 

모든 것을 참는다.’의 말씀을 영어로는 “Love never stops being patient."입니다. 사랑은 참아가며 배워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정의할 때, 우리는 좋은 감정이나 좋은 관계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고, 감정이 나빠지면 그 관계를 무너트립니다.

 

왜 우리는 관계에서 은혜의 마음이 필요한가요? 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참으며 인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관계하는 배우자나 사람들이 모두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내와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에 완벽한 사람을 기대하고 결혼을 하지만, 막상 함께 살면서 발견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안에 감추어진 허물들이 가까운 관계가 되면서 밝혀지고, 서로 실망을 하기도 하면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저와 저의 아내는 자라온 환경이나 성격이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이 완벽하고 다툼이 없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툰적도 있었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도 많이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인내하면서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대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대한다면 더욱 은혜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 7). 우리가 상대를 받는 것이 상대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의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포기하지 않는 은혜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가 잉태된 순간부터 기대하며 자녀를 기대하고, 산고의 고통을 거쳐 자녀를 낳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신의 생명을 다할 때까지 자녀를 향한 희생과 섬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떠한 순간에도 자녀를 향한 은혜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은혜가 부족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서로를 향하여서 은혜가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우도록 합시다. 그리고, 필요한 곳에 보내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8. 사랑은 신뢰를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 7).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 끊임없는 신뢰를 보냅니다. 사랑의 다른 표현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비록 실수할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끊임없는 신뢰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서로를 사랑함으로 변함없는 신뢰를 보낼 때에 일어납니다. 만일 가정에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아내는 남편을 의심하고, 남편은 아내를 의심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서로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불편한 마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누군가가 우리를 믿어주고 신뢰의 박수를 보내줄 때입니다. 가정에서 행복한 남편은 아내가 남편의 모습에 대하여 신뢰를 보내주고, ‘우리 남편 최고!’ 라는 메시지를 받으며 살아갈 때입니다. 남편의 모습은 결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남편과 아내는 고유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하나 뿐인 소중한 대상이기에 결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믿어줄 때에 자녀들은 더욱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주면, 우리는 신뢰의 언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뢰하기에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믿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들이나 리더십을 향하여서도 신뢰의 믿음을 보일 때에, 우리는 더욱 행복하며 진정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서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만큼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신뢰의 마음으로 살아감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자라가는 것이며, 사랑함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