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나무시리즈 (7) - 언어생활의 능력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잠 18: 21).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생활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위대한 생각과 마음을 말로서 표현했습니다.
윌리엄 캐리 -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마틴 루터 킹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4명의 어린 아이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의 개별성에 의하여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 -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라.
성경에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가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자신들의 믿음과 용기의 표현이었습니다.
갈렙 -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 12).
여호수아 - “...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 15).
에스더 -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 16).
욥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 10)
사도바울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 24).
예수 그리스도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 10)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위대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믿음의 언어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 28).
잠언 기자는 사람이 언어생활로 인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의 열매를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생명의 씨앗과도 같습니다.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씨앗과도 같아서 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틴루터킹 목사님이 선포한 말이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의 미국 흑인대통령이 되면서 성취된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선포하며 나아갈 때에, 말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큰 배가 어떻게 항해를 합니까? 바람을 맞으며 넓은 바다를 향하여 항해하는 배는 항해사의 키에 의하여 조종되어 집니다. 작은 키가 큰 배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곤 합니다. 즉,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12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올 때에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10 명은 가나안 자손들은 대장부이기에, 우리는 그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선포합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민 14: 9).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선포로 담대함을 나타내었습니다. 백성들은 10 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오히려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20 세 이상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앞으로 사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저들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됩니까? 저들이 어떠한 말을 사용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함으로 가나안을 향한 믿음이 없던 사람들은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가나안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선포한 믿음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하여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을까요?
1) 우리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 8).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하며 기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사용한 언어는 믿음의 언어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고 말한대로 이루신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시행하리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선포를 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10 명의 정탐꾼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지 않았기에, 그들의 믿음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그들이 사용한 말로 인하여 결정되어 진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비전적이며 긍정적이고 믿음의 말을 사용한다면, 이는 우리의 생각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언어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미래의 꿈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함께 경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우리는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 28).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다면,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성공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평이나 비방, 원망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 6). 어떠한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망과 생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말을 사용하느냐를 잘 관찰하면, 우리가 육신의 생각에 있는지 아니면 영의 생각에 있는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신뢰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품는 생각은 내일의 나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속에 잠겨 있으면, 자꾸만 부정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비전과 열정을 품게 되면, 우리에게는 미래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생각은 운명입니다. 미래의 운명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 사용하는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말을 바꾸기 원한다면,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이 말을 통하여 표현되어짐을 믿기에, 우리의 말은 생각을 반영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사랑의 언어는 회복을 가져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 29).
언어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언어를 잘 사용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게 되면, 우리의 언어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그 언어는 부정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주는 말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고, 그 결과는 관계의 단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상처를 치유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손이 자녀들의 아픈 마음을 회복하고 치유하듯이, 우리의 사랑의 표현은 사람들의 마음을 회복하며 치유함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치유의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며 감싸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삶은 무너진 관계를 세우고,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인간과 단절된 관계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표현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1) 덕을 세우는 언어를 사용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 29).
성경은 우리가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선한 말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덕을 세우는 것의 의미는 ‘집을 세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성도를 세움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모두가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집을 세우는 공사의 현장에서 일꾼들은 모두가 힘을 써서 집을 세우는 팀이 되어 일을 합니다. 누군가는 못질을 하고, 누군가는 콘크리트를 놓으며, 누군가는 외장 공사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세워진 집을 망치로 허문다며, 그는 더 이상 쓰임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를 믿음과 사랑으로 세워야 합니다. 형제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말씀으로 서로를 세우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 14: 19). 서로 화평과 형제를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은, 우리의 언어로서 쓰임받을수가 있습니다.
2)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 24).
격려는 힘을 주는 말입니다. 칭찬과 격려는 고래도 춤을 추게할 만큼, 삶에 활력과 동력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격려는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가치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격려로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힘에 지쳐 힘들어하고 있을 때에, 격려는 다시 일어나 도전하게 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격려의 말 한마디는 이와같이 큰 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격려해야 할 대상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직장이나 사업에서 지쳐있는 가장들, 부부 문제로 힘들어하는 가정들, 자녀나 재정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격려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요?
므비보셋이 가문이 망하고, 아버지를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다윗의 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격려합니다. 그를 자신의 상에 초대하여 왕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격려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격려합니다. 자신의 과거로 인하여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실망하여 다소로 내려갔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찾아가서 격려하며, 그를 사역의 현장에 세우며 그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이와같이 격려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격려에 힘입어 자신감과 용기를 얻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말로 인하여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격려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낙심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낙심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향하여 믿음과 선행을 격려하여 함께 아름답게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3. 감사의 언어는 행복을 가져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 17).
감사하는 말은 행복을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잘못된 언어생활은 불행을 가져오지만, 바른 언어생활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는 감사의 말은 감사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감동을 가져오게 됩니다. 감사가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지만, 자신의 눈이 어두워서 그 감사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국의 트렌취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취어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삶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추구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야 말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의 말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을까요?
1)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 18).
우리가 큰일에는 감사하기 쉽지만, 작은 일에는 감사하기가 인색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해 보이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는 습관입니다. 우리의 입술로 감사하게 되면, 작은 것에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서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할 세금이 있다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할 게 너무 많다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닦아야 할 방과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먼 곳 맨 끝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에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영 귀에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 몸이 뻐근하고 피곤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내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에,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데,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참으로 감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역경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 1: 21)
고난과 시련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은 탁월한 영적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경속에서 불평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에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입술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차갑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말로서 감사하게 하면 마음에 감사의 뜨거움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조건을 찾지 못할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감사하게 되면 감사를 통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코리는 폴란드의 한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였고,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코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18말씀을 읽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 말씀은 코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코리는 언니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서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눈을 감고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는 아멘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코리는 벼룩을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을 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코리와 언니는 매일 성경 말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게 되자 그곳에는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입술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거하는 곳이 작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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