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베드로전서 강해(3) - 행실을 선하게 하라

비전의 사람 2016. 4. 16. 21:31

베드로전서 강해(3) - 행실을 선하게 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2).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인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3:20).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부르시는 날 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분명하지만 이 땅에 남겨진 존재 이유를 발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향하여 나그네와 행인같은 자들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다른 나라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자로서 그 나라 시민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키며, 행인은 일시적으로 옮겨다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도가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고, 본향은 영원한 천국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이 세상은 세속적인 세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입니다. 이때 베드로전서는 우리의 삶이 선한 행실을 통하여 세상에 보여주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며 주님이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게 되는 것이며, 주님이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로서 어떻게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할까요?

 

1.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성도가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에 우리의 처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날은 우리가 육체의 장막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망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영혼이 서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세속적인 정욕이며, 죄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죄에 집착하는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리는 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제어하라의 의미는 끊을 것을 권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은 육신을 만족하기 위하여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에, 깊은 정욕의 죄에서 깨어나 정욕을 육체에서 끊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육체의 소욕을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7) 라고 했습니다. 성령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와 육체의 정욕은 함께 할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믿음으로 육체의 정욕을 담대하게 끊어 버리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그 비방을 피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청년 사역을 하면서 지난 수년간 젊은이들의 영적 우상이었던 한 목사님이 육체의 정욕에 빠짐으로 교회와 한국 교회에 큰 아픔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서 수많은 크리스쳔들이라고 할지라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함으로 죄에 빠지게 되고 음란과 방탄에 빠져서 세상의 조롱 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육체의 정욕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로마서 13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12-14). 육신에 속한 정욕의 일은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 질투인 것입니다. 육체를 만족하고자 죄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경건이 더럽게 되어 세상의 조롱 거리가 되며 주님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이기기 위한 길은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는 원리는 말씀안에 거하며 순종하는 삶이며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국가의 제도에 순복해야 합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전 2:13-14).

 

베드로가 서신을 보내는 대상은 갈라디아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아 구별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의 도전은 믿음으로 인한 핍박과 시련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국의 백성이기에 영혼의 자유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더 높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대항하거나 목숨을 걸고 봉기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핍박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하는 자들을 향하여 주는 메시지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의 책임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복하는 선한 행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는 것입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5). 로마의 통치속에서 신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모든 제도에 순복하라는 도전은 결코 쉬운일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들이 열심히 모든 재물이 세금으로 수탈되기도 하고, 불합리한 제도로 인하여 어려운 상황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서 모든 제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특히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는 방백, 즉 로마의 지방 행정관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의 위정자들에게 권위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13:1).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국가의 위정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를 의와 공의로 통치하며 백성들을 위하여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백성들을 무시하는 위정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는 네로 황제로서 사악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적인 연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세운 제도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악한 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4월 중순 총선에서 나라의 법을 발의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존중하며 정직한 위정자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이 선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 링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위정자들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라의 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정욕으로 법을 무시함으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벧전 2:17).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벧전 2:17).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경외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경외함의 자세를 가진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공경하는 자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로서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향한 존중감을 갖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인생의 황금률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12).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기를 본능적으로 기대합니다. 우리의 신분이나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서 재벌 2세나 3세의 갑질 논란을 보면서 함께 분노하기도 합니다. 대한항공 조연아 부사장이 승무원을 함부로 대했다가 큰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대림 산업의 부사장이 운전기사에게 함부로 대하면서 인격적인 손상을 주면서 스스로 어려움에 처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사회적인 신분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존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뭇 사람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하다의 의미는 가치를 높이 평가함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차별없이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영성인 것입니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약자에 대한 존중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성도와 교회는 모든 사람을 향한 존중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희 교회의 지체들은 교회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모욕감을 느끼는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가족이나 이웃, 직장에서도 우리로 인하여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존중한다면 그 열매가 자신의 삶에 큰 유익으로도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성공하는 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퍼센트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퍼센트가 인간관계였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히 세 가지 방문을 잘 했는데 입의 방문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 세 가지입니다. 입의 방문은 전화나 말로써 사람을 부드럽게 하며 칭찬하는 것이고 용기를 주는 방문입니다.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런 것을 잘 하는 사람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겸손을 배우는 비결은 적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먼저 어린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관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르신 노부모님을 찾아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 드리며 공경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와 이웃들에게 먼저 인사함으로 고개를 숙이고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서도 인사도 안하고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겸손과 은혜의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4. 우리는 까다로운 상전에게라도 순복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벧전 2:18).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에서도 선한 행실로 본이 되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고용인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하는 상전을 만나기도 합니다. 특히 불의와 타협하지 않거나 방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더 큰 시련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존경심으로 상전을 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존경심을 가지고 순복하라고 권면합니다. 까다로운 자들이란 누구인가요? 그들은 마음이 뒤틀린 자, 강팍한 자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인격이 올바르지 않음으로 인하여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전과 함께 일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그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려고 열심히 일하지만, 더 큰 권세를 가진 상전이 함부로 대하거나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게 된다면 큰 고난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것을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19,21)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순복하는 모습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까다로운 상전이라 할지라도 순종했던 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요? 야곱은 까다로운 라반의 요구에 응하게 되고 순종하게 됩니다. 결국 야곱이 속임을 당할지라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심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신하로서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며 섬기게 됩니다. 그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다윗은 사울왕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하로서 순종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까다로운 상전을 섬기며 순종하는 모습으로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이며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오래 참음과 인내와 관용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본을 주심으로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받으실 때에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입에 궤사가 없으셨으며, 욕을 받으시나 대신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이 고난 중에라도 공의의 하나님께 의탁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힘들고 억울하고 어려운 일이 까다로운 사람들로 인하여 찾아오게 될 때라도 주님께 맡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선행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함으로 경건한 행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는 달리 신뢰할 수 있는 정직성이 있다는 칭송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제도에 순복함으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의 비방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선행입니다. 또한 우리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존중감으로 대하게 되면 그들은 우리를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까다롭고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상전이라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선행을 보이게 되면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