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4) - 고난을 극복하는 자세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화려한 삶이 아니라 불행하고 어려운 고난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를 키워 준 형은 자신을 무척이나 미워했습니다. 결혼한 지 13년 되던 해 부인이 죽었고, 다시 결혼하여 수무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열명은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어려운 삶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을 작곡하게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요한 세바스챤 바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심오한 찬양을 작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생의 고난을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곡한 곡의 마지막에는 항상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단어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에는 항상 ‘예수 이름으로’ 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바하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기로 결단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도하시는 필수 과정은 고난의 길입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손에 빚어지는 모습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며 성숙해가는 길을 찾게 됩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는 시편 기자와 같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의 다른 의미는 고통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더욱 값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을 보내셔서 우리를 빚으시고 연단하셔서 하나님의 진실된 사람으로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며, 우리도 주님과 같이 고난의 걸을을 따라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받아야 하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성숙한 성도로서 어떻게 고난에 대처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고난의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 8:32).
왜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가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로 인하여 깨어지고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는 죄의 결과로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5-18).
죄로 인하여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여인은 잉태하는 고통을 느껴야 하고,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게 되며, 땅은 저주를 받았기에 일하고 수고함으로 그 열매를 먹게 되었습니다. 또한 땀을 흘러야 식물을 먹을수가 있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에 사람들은 서로 탐심을 가지고 전쟁과 싸움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질병을 얻기도 하며, 땀을 흘려야 음식을 먹을 수 있기에 경제적인 전쟁의 현장에서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고통을 피하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압제속에서 큰 고통을 당했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 여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기 위하여 나봇을 죽이는 악행을 행하자,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십니다. 또한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함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그의 잘못된 행실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큰 고난가운데 죽게 됩니다. 삼손이 드릴라와 향락에 빠지게 됨으로 자신의 힘을 잃게 되고 큰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죄로 인하여 찾아오는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욥과 같이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찾아오는 고난을 만나게 될 때에는 인간적으로 너무나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감당하는 고난은 의미가 있고 큰 유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3).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는 고난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의 참된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선하신 손길은 우리를 빚으셔서 주님의 형상 닮게 하시는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 8:32).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빚어가시는 섭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고난을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19).
우리의 인생에서 고난을 만나면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것은, 그러한 고통에 매여 억누리기 때문입니다. 재정의 문제에 매여 억압을 당하여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물질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물질의 고난이 찾아오면 문제에 빠져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건강의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건강의 아픔 속에서 힘들어하며 생존의 위협까지 느낄 때에는 크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삶의 행복을 빼앗아가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생의 고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19) 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우리가 해야 할 자세는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안에서 문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면 결코 헤어나지 못하고 더욱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영적인 안목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어떠한 고난에서도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되면 죽음조차도 우리를 억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죽음조차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천국의 문으로 승화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고난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며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보다는, 영적인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해답을 얻고 하나님의 응답을 누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비전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의 비전은 문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문제를 바라보면서 문제로 인하여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을 성취하는 종으로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깊은 고난에서 인생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인생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자아를 깨트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가 가장 어려운 시간에 가장 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인생의 고난을 겪게 됩니다. 가장 의로운 자였지만 그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녀가 사망하는 고통과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시련을 겪으며, 그의 배우자와 친구가 자신을 정죄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욥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깊은 시련에서 욥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고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욥은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발견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자족하는 연약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직 자신의 연약한 모습이 연단되어 정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받아야 되는 필요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 이러한 지혜를 선포합니다.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 28:28).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삶이 인생의 지혜이며 명철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난이 찾아올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하시는지요?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시며 그 고난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육체의 지혜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하면,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에 영적인 원리로 해결하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고난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 22-23).
우리는 고난이 찾아오는 환경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이 찾아올 때에 반응하는 자세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는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어 온 국민으로 금 신상에게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믿음으로 절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왕은 그들을 풀무불에 던질 것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때 세명의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 3:17-18). 그들은 자신들이 풀무불에 던져저도 하나님께서 능히 건지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지켜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지키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의 모습에서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본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1-23). 주님께서는 고난에서도 입술로 원망하시거나 욕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본을 본받아야 합니다. 비록 고난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고난의 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기자는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3).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성도가 고난속에서 배워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저는 페이슬리 목사님의 간증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페이슬리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암으로 투병하시면서 큰 고통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한번도 입술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신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사모님을 치료하신 의료진으로부터 페이슬리 목사님의 사모님은 ‘자신이 아는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칭송을 받은 것은 고난에서도 흔들림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에서도 흔들림없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지키는 자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믿음의 사람을 보여주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고난이 주는 유익을 기대해야 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4-25).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지만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는 “...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죄를 그치게 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육체의 남은 세월을 살기로 결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이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가셨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답변외에는 어떠한 말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이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와같이 고난에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고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며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됨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4). 우리의 고난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게 되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고난이 찾아와도 인내해야 합니다.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됨으로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고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약 5:11). 우리가 욥과 같이 인내하게 되면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욥과 같이 좋은 결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결말을 누리기 전에 우리는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고난에서 인내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8-29).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에서 믿음의 안목으로 인내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빚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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