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의 참된 의미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침례교회의 특징은 성경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믿음입니다. 침례교회는 전통이나 교단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믿음은 순수한 복음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과 교회의 관한 가르침을 지켜서 다음 세대에까지 전수하려는 순결함입니다. 침례교도로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교리 중의 하나는 침례입니다. 카톨릭이 시작된 이후로 침례교인들은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 많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침례의 이슈였습니다. 카톨릭은 행위로 인한 구원과 유아 세례 등의 교리를 주장하였으나, 침례 교도들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물침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미 그들 중 상당수는 유아 세례를 받아서 다시 침례를 받는 것은 카톨릭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지키려는 자들은 침례를 받는 믿음을 지킴으로 인하여 중세 시대동안 오천 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며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이 지킨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침례 교회를 세워가면서 순순한 믿음을 지키며 전수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침례교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가기 위하여 침례의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그 믿음위에 굳게 서고자 합니다.
스펄전은 회중 교회의 목회자 아들로 자랐습니다. 회중 교회는 유아 세례를 주는 교단이었습니다. 스펄전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물을 이마에 뿌리는 세례나 유아 세례는 비성경적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이 자신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에 찰스 스펄전은 자신이 몸담았던 회중 교회가 아니라 성경적으로 물에 잠기는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13 km 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켄트로우 목사에게서 강에서 침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에 스펄전은 침례 교회의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침례교인이 되었습니다. 스펄전이 세례 의식을 행하던 회중 교회 대신에 침례 교회를 선택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침례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90년 전후에 ‘시베리아의 불꽃’ 이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과거 소련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당하는 시련과 고난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 산의 호수에 가서 얼음을 깨고 침례식을 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KGB 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어져서 고문을 당하고 큰 핍박을 당하는 사실을 간증한 것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저의 가슴에 남는 이야기는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속에서 침례를 받는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침례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침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6).
침례는 헬라어로 baptizo 로서 ‘물에 잠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baptizo 라는 단어는 bapto 라는 헬라어에서 파생했는데 이 단어는 ‘염색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천을 염색하기 위해서 염색물에 담가야 합니다. 이와같이, 침례의 원어는 물에 완전히 잠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물에 들어가셨다가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침례는 물을 뿌리는 세례가 아니라, 물에 온몸이 잠기는 침례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침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침례는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행했던 의식이었습니다. 성경학자인 Lightfoot 은 개종자의 침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먼저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입교하기 위해서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할례의 상처가 아물면 침례를 받도록 하였다. 개종자에게 간단한 율법을 가르친 후에 물에 잠그고 나오게 했다. 침례를 받고 개종한 자는 비로서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다.” Lightfoot 은 침례받는 사람은 전체 몸을 물에 잠기도록 했다라고 했습니다. 유대 개종자들은 할례와 침례를 통해서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씻는 것의 의미를 몸을 씻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정결의 표시로 몸을 물로 씻거나 의복을 씻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또는 손과 발을 씻기도 했습니다. 시체를 만졌거나 문둥병이 나았으면 정결 의식을 행했는데,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몸과 의복을 씻는 행위가 포함된 것입니다. 이때 정결의식은 몸을 물에 잠그는 씻음이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막 1:4). 침례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하기 위하여 침례 요한에게 나아와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침례는 구약 시대의 정결의식이나, 유대교 개종의 침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식입니다. 신약 시대의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침례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는 물로 씻음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이지만, 침례는 정결케 하는 의식이 아니라 거듭나서 새사람된 사람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침례는 그 원어가 ‘염색하다’ 또는 ‘물에 잠기다.’ 입니다. 우리는 침례의 진정한 의미를 염색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얀 천이 푸른 염색물에 잠기면 푸른 천이 되어 나옵니다. 만일 하얀 천이 붉은 염색물에 담기면 붉은 천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침례는 변화된 우리의 신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후에는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는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신분의 변화이며,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침례는 죽으시고 장사 되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데,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새 생명을 얻은 내적 변화의 외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4).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옛 사람을 장사하고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의 상징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냈다가, 새생명으로 살아는 내적인 구원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즉, 물에 잠기는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장사되었다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새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내적인 구원을 외적인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교회 앞에서 시인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는 대상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교회는 침례를 받은 성도를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여 함께 교제하며 믿음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2. 침례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명하신 침례를 주라고 하신 말씀을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잘못된 침례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첫째, 물을 뿌리는 세례입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 (행 8:38-39).
성경적인 침례는 물에 잠기는 침수였습니다. 침례의 헬라어로는 baptize 는 영어로는 immersion, dip 인 ‘물에 잠그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도 물을 뿌리는 sprinkle 로 표현된 곳이 없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후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병거를 타고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침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흠정역에는 사도행전 8장 37절에,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줄 믿노라.” 고 응답합니다. 그러자, 비립과 내시는 둘다 물에 내려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게 됩니다. 만일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았다면 물을 떠다가 이마에 뿌리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라는 표현은 둘이 물에 내려가 물에 잠그는 침례를 받고 함께 물에서 올라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고, 에디오피아 내시도 물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물에 온몸을 잠그는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에 잠그는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복음의 변질로 인한 것입니다. 로마에서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카톨릭이 시작되면서 복음의 변질을 가져옵니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서 행위로 인한 구원으로 교리의 변질을 가져옵니다. 그러면서, 믿는 자의 침례에서 침례에 의한 구원이 강조되기 사작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침례를 받으면 죄 용서 되는 교리가 카톨릭에서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아픈 자들이 침례를 받기 어려워지면서 물을 붓는 관수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죽게 되자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유아 침례까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아픈 자들이나 유아들에게 침례를 주기가 불편하게 되자, 카톨릭에서 침례에서 세례로 의식을 바꾸게 됩니다. 이는 복음의 변질의 결과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가르침을 지켜야 하는 기관이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을 바꿀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을 뿌리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구원을 상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침례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구원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뿌리는 세례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둘째, 유아 세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아 세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입니다. 유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거나 죄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유아에게 침례의 의식을 행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복음을 변질시키는 모습입니다.
유아 세례는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기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아들이 아프거나 해서 죽게 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유아 세례를 통해서 아이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유아 세례를 실천했고, 장로교나 감리교 등이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개혁을 했지만 세례나 유아 세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유아 세례를 하는 개신교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복음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는 유아들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영혼을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여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유아들의 영혼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이 “...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상 12:23) 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죽은 아기에게로 간다는 것은 아기가 하나님의 품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셋째, 침례에 의한 구원입니다. baptismal regeneration.
침례에 의한 구원의 교리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는 침례를 받음으로 새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결코 행위나 의식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죄사함 받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새생명으로 살아난 새 사람을 보여주는 모형이자 그림입니다. 침례는 내적인 구원의 역사를 물에 잠기면서 보여주는 외적인 그림입니다.
침례의 의한 구원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이며 복음을 변질시킨 결과입니다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얻는 다는 가르침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한 구절 가지고 교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를 침례를 통하여 간증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자는 침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1). 베드로의 말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침례를 받게 되면서 이 날에 삼천이나 교회에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이단들은 침례나 세례와 같은 의식을 구원의 과정에 포함시킵니다. 카톨릭이나 몰몬,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 루터 교회 와 같은 교회들은 침례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얻는 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례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알아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상 명령을 통하여 거듭난 영혼에게 침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침례를 통하여 영생을 얻게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유아들에게 침례를 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침례를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베드로전서는 침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표라고 했습니다. 침례를 받음으로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하는 선한 양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3. 믿고 구원받은 자는 침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2).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의식입니다. 교회는 주의 만찬과 침례의 의식을 행합니다.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은혜를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주님께서 우리를 행하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룩하신 구원이 우리 안에 이루어졌음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침례에 순종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침례는 구원받은 자의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상사명을 주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지상 사명인데, 그 중에 침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주님께 순종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간증해야 합니다. 개인의 구원을 공적으로 공표하는 침례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장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이 새생명으로 행하는 구원의 믿음을 침례를 통해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의 고백이 의식으로 뿐만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구원을 통해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듯이, 이제 우리도 침례를 통해서 옛 사람의 행실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며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가는 거듭난 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배경에서는 믿고 침례를 받게 되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지역 사회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유대교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가족간의 관계도 끊어지고 지역 사회에서 추방되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침례를 통한 믿음의 공적인 고백은 자신의 분명한 믿음을 보여주는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련을 직면하더라도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명하신 지상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순종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둘째, 침례는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합니다.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1).
침례는 구원받은 자의 공적인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침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어, 새 생명으로 살아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적인 구원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누군가가 구원을 받게 되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교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간증하고 그 증거로 물에 잠기는 침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을 통해서 교회는 교회의 지체이며 회원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가진 지체로서 함께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세워가는 회원으로서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고 회원이 된 지체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초대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침례를 받은 후에 교회에 삼천이나 더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침례에 순종함으로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교회에 회원으로 더해진 것입니다.
셋째, 침례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의 결단입니다.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1).
사도행전은 침례를 받은 신자를 향하여 제자라고 명칭했습니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며 배우는 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주님을 따르며 배웠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침례에 순종함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 25년 만에 대학 동기를 만났습니다. 대학에서 같은 기독학생연합회 활동을 하던 믿음의 친구였기에 반가웠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미국에서 사역을 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대학교에서 친구의 초청으로 특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삶과 가치는 온전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정은 불신의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강한 무신론자였다고 합니다. 강력계 형사이기에 그 영향력이 무척 커서 자신이 교회를 다니는 믿음의 사람임을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에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가 주님께 헌신하는 삶이 가장 소중함을 깨닫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아버지는 딸과 절교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의 딸을 딸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픔을 견디며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그 후에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자 아버지는 마음이 누그러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딸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자매는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고 자신의 길이 험난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제자로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침례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말해주듯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옛 사람에서 벗어나 새사람을 입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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