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3) - 간음하지 말라 (마 5:27-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간음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간음은 성적인 죄에 해당됩니다. 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 성은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외로움을 보시고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셔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선물이 성에 침투하여 성을 부패한 음욕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선물인 성이 부부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용되어지면 가장 부패하고 더러운 죄가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와 같은 성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 나라가 부강해지면 찾아오는 것이 쾌락이고, 쾌락의 중심에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이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방 신전에는 매춘부가 여사제로 있어서 우상 숭배자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음란의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시대에는 운동 선수들이 경기를 할 때에 나체로 운동을 할 만큼 성적인 타락과 방종이 만연했습니다. 그러한 성적인 방종은 거룩한 가정에도 침투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음란의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종류의 성적인 죄와 방종으로 가정과 사회가 오염되고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동성애자들이 서울 광장이나 대도시에서 축제를 하며 동성애를 성적인 자기 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테두리를 벗어난 성적인 죄가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성적인 탈선과 죄가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거룩과 정결을 지키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간음을 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산상수훈을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은 간음의 기준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주님께서는 십계명의 칠계명인 ‘간음하지 말찌니라.’(출 20:14) 라는 말씀을 통하여 간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십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당시의 유대인들은 칠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 는 말씀을 배우자외의 이성과 육체적인 성행위를 하는 것에 기초하여 이해했습니다. 즉,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허용되지만, 행위로 간음하는 것은 큰 죄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간음의 정의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셨을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세우게 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4-5). 신명기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 22:22) 라고 기록된 말씀으로 고소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간음을 한 죄는 돌로 치는 형으로 죽임을 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같이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배우자외의 이성과 성적인 행위를 간음으로 해석했지만, 주님은 육체로 죄를 범하기 전인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을 간음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주님은 육체로 행하는 간음을 간음죄로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음욕은 영어로 ‘lust'입니다. 음욕은 욕심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소유하고자 하거나, 도덕적으로 나쁜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성적인 욕망을 가지고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욕심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욕심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잉태하는 기간이 지나면 죄가 출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10개월간의 잉태과정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을 잉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와같이 죄는 순식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잉태하는 과정을 갖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의 유혹이 찾아오면 죄가 마음에 잉태되기 전에 버려야 합니다. 죄는 마음에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나쁜 죄악의 생각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잉태된 욕심이 때가 차면 죄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삶에서 성적인 죄를 범하는 범죄자들은 우연히 현장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컴퓨터의 동영상으로 음란한 영상을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바라보면서 그 마음에 죄를 잉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성적인 욕심이 마음에 잉태가 되면서 대상을 찾아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종종 학생들이 학교에서 총기 사고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게임이나 영화로 사람을 죽이는 게임에 노출이 되었거나 폭력 영화에 중독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욕심을 마음에서 제거하지 않고, 마음에 깊이 숨겨두었다가 잉태가 된 후에 행동으로 나타나 범죄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곳곳에 폭력과 성적인 이탈의 이유는 마음에 그러한 생각과 욕심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컴퓨터에 음란한 영상이 가득하고, 음란한 영화나 게임에 노출되어 있다가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의 결과로 사망에 이르는 가슴아픈 일들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시작되는 곳인 마음을 지켜 순결한 마음을 소유함으로 간음과 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의 정확한 해석은 성적인 욕심을 품고 여자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자는 마음속에서 이미 간음한 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나쁜 생각이 들어오면, 죄악된 생각이 잉태되지 않도록 마음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성령의 씻어주시는 역사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부정한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는 죄악된 생각이 성령의 역사로 씻겨지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2. 주님은 간음은 지옥에 가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9-30).
주님은 간음의 죄의 결과는 지옥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입니다. 그곳의 고통은 영원하기에 큰 형벌의 장소입니다. 주님은 간음하는 것은 지옥에 가는 죄이기에 차라리 눈이나 손이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고, 온 몸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마음에 간음하는 죄를 지적하시면서 눈과 손을 언급하셨습니다. 사람이 육신의 정욕을 만족하고자 할 때에 눈으로 바라보고 손과 같은 몸의 지체로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속이 너로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범죄하면 그 결과는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이 범죄하도록 유혹하면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체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범죄함으로 온 몸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눈이나 손이 없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산악 사고를 당하여 바위에 손이나 발이 빠져 며칠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손을 절단하여 스스로 빠져나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간음을 행하는 자들이 눈으로 음욕을 품는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하려고 유혹할 때에 음욕을 품고 바라보았습니다.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 39:7). 영어 성경은 “his master's wife looked with desire at Joseph, and she said, "Lie with me." 라고 했습니다. 이는 정욕의 눈으로 요셉을 바라보다가 기회가 되자 나와 눕자 라고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안목의 정욕으로 바라보다가 그 후에 육체의 정욕을 만족하기 위하여 죄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왕국을 거닐다가 왕궁 위에서 한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이 바라본 여인은 밧세바로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눈에 보인 여자에 대하여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2) 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바라본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였기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인 줄 알면서 데려다가 동침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다윗이 간음한 원인은 눈으로 목욕하는 여인을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범죄의 결과는 그와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주님은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눈을 빼어 버리고 온 몸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이른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의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음의 죄도 지옥에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신 성경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눈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게 함으로, 사람이 마음에 이미 간음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칠계명을 깨트렸기에, 그들의 어떠한 노력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만이 구원받아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행위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용서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받습니다. 지옥의 장소는 실제적인 미래의 심판의 장소임을 믿어야 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옥의 진노에서 피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유혹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한 고통을 무겁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는 눈을 빼게 하고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암적인 요소입니다. 당뇨로 인하여 발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면 의사는 즉시 썩은 발을 절단합니다. 시간이 늦으면 생명을 잃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죄는 팔을 썩게 하고 온 몸이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무서운 암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간음과 같은 성적인 죄는 비참한 종말을 가져오기에 자신의 마음을 깊이 지켜야 합니다. 특히 눈으로 음란한 영상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음란한 것으로 눈을 만족하고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쾌락에 빠지는 것은 죄의 길에서 사망으로 이르는 과정에 있게 합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 성령의 은혜아래 거하며 인도함을 받으면 육체의 욕심을 멀리하게 됩니다. 눈이 주님을 바라보면 음란한 영상이나 죄에 대하여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죄가 잉태되기 전에 마음에 생명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면 세상의 우상으로 가득 채우려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물질로 만족하고, 허영심으로 자신을 치장하며, 음란한 것으로 쾌락을 찾게 되면서 욕심이 잉태되어 죄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눈과 같은 몸의 지체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의 몸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에베소서의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리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 5:3) 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은 결혼의 언약을 굳게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1-32).
주님은 당시에 아내를 함부로 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를 취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간음하지 못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아내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신명기의 말씀처럼 이혼 증서를 주고 아내를 버리는 일이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혼 증서는 신명기 24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신 24:1-2).
주님은 이혼에 대하여 마태복음 19장을 통하여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9:3) 라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통한 결혼의 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 사람이 그 부로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마 19:5-6). 주님께서는 둘이 한 몸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마 19:7)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으로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지만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결혼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분리될 수 없듯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하여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하면서 배우자가 간음하는 것과 같은 죄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백성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이혼을 허락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는 ’아내를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제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신 24:1) 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수치되는 일‘ 이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남편이 아내와 쉽게 헤어질 수 었었습니다. 심지어 결혼할 때에 아내가 지불한 지참금을 착복하기 위하여 남자들에게 악용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혼하면 지참금을 돌려주어야 하지만, 지참금을 돌려주지 않고 내보냄으로서 아내는 큰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는 두 가지의 큰 학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힐렐 할파와 샴마이 학파였습니다. 힐렐 학파는 가말리엘의 조부였는데, 그는 ‘수치되는 일’을 해석하면서 이혼의 사유를 네 가지로 규정했습니다. 첫째, 아내가 알지 못하는 남자와 말할 때, 둘째, 음식을 태울 때, 셋째, 남편이 개에 물렸는데 즉각 치료해 주지 않을 때, 네 번째는 다른 아내보다 매력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이와같은 이혼의 사유는 철저하게 남자 중심이며 여자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샴마이 학파는 더 보수적이어서 아내가 간음을 하는 것이 이혼의 사유로 한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가 정당한 이유없이 밥을 태웠다는 이유로 이혼되어 거리로 내팽겨치는 부패한 사회에 대하여 주님이 이혼의 정당한 사유 한 가지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은 간음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 19:9). 주님께서는 당시에 다양한 힐렐 학파에서 가르치는 황당한 이혼의 이유에 대하여 남편과 아내와 모두 간음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이라는 제도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지자,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이혼 증서를 주어 아내를 보내도록 했고, 이혼한 아내는 나가서 다른 사람과 만나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합법적인 이혼이 아닌 상황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간음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혼이 성립이 안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내어 보내면 아내도 간음하게 하고 버린 여자와 장가가는 자도 간음의 죄를 범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남편들이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른 여자가 눈에 보인다고 해서 자신의 아내를 함부로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율법을 지킨다는 바리새파인 힐렐 학파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아내들이 버림을 받고 있었고 결혼의 제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모습을 간음의 죄로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마 19:6) 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에게 신실함으로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배우자의 허물이 나타나면 사랑과 기도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배우자가 음탕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한 몸인 부부가 나누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하여 신실함으로 음행하거나 간음하지 않고 서로를 향한 사랑을 지켜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간음이 마음에서 잉태되어 죄가 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비결은 주님을 바라보며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이 마음에 거한다면 조금의 잘못된 생각이나 음란함이 생각과 마음을 차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순결하고 주님의 은혜로 만족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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