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8) -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요 6:9).
오늘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깊은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의 참된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예배나 모임 때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기도 하거나 찬양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즉,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담긴 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9).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셔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5).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양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자이상의 독생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독자는 유일한 아들입니다. 독생자는 영어로 only begotten son 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신의 속성을 공유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속성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셔서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가득함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골로새서는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15,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 (사 66:1) 라고 표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랍비의 우화에 의하여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녀를 어깨에 메고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로 종종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향한 큰 사랑을 갖고 있듯이, 하늘의 아버지는 양자 삼으신 우리를 향한 큰 사랑을 베푸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간절함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도록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예를 영광스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 높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기도 하고 거룩히 여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니라 ...” (겔 36:23). 그 이름을 더럽게 하거나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련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로 결단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다 2:47)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그 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믿음으로 풀무불의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무불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때 느부갓세살 왕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즉 무시하거나 무례에게 하면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함으로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때 다리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다 6:26). 이와같이 믿음의 사람들이 시련을 만나도 굴복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는,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레 22:32) 라고 했습니다. 성호는 거룩한 이름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정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는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세상의 죄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의 뜻은 ‘구별하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하나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행할 때에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그 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행실로 나가갈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행하며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 모독을 받지 않고 존귀한 이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우리의 삶과 행실에서 거룩하며 하나님의 존귀함을 드러나는 품격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시옵시며’ 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이제는 그 나라의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는 바로의 다스림을 받았지만, 약속의 땅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셔서 인도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의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짐을 받은 주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주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아 거듭나고 성령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마음에 임했음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 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다스리시는 것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함으로 그 분의 뜻을 성취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하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순복해야 합니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주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분의 뜻이 있습니다. 그 분이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며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갈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면 자신의 뜻을 먼저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그 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잔인한 고문과 죽음의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통을 감당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4).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2). 주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기에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육신의 정욕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도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팔면 어느새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우리는 주님의 뜻을 더욱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4-5)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날마다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5. 우리는 날마다의 필요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1).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daily bread)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매일의 삶에 필요한 식량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육식을 가지고 살기에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잠언 30장 8절의 말씀의 배경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잠 30:8). 잠언 기자는 죽기 전에 두 가지를 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을 자신에게서 멀리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하거나 부하게도 말고 오직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잠언 기자가 구한 필요한 양식은 일차적으로는 음식을 의미하지만, 음식 이외에 육신의 기본적인 필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일용할 양식은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매일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필요한 만나와 메추라기만을 내리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 (출 16:4).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만나로 내려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당시에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곡물을 곱게 빻아서 불에 굽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아내가 있는 제자는 아내를 집에 두고 홀로 주님을 따라야 했기에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배우며 따르는 것에 시간을 보내었기에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다른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매일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께 헌신해서 살아가는 풀타임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는 제자의 삶을 위해서 삶의 일부분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매일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선교를 위하여 물질을 드리고 희생하는 믿음을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나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1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을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희생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르는 자를 향하여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 18:28-30).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희생한 믿음을 하나님은 이 세상과 내세에서 여러 배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6. 우리는 용서받기 위하여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용서는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용서에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실 지를 결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압제와 불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용서하지 않는 종에 대한 가르침이십니다. 종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지만 그는 일백 데나리온의 적은 빚을 용납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감옥에 가두고 그 빚을 다 갚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는 구원받기 위하여 죄 용서 받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죄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가득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능력을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마음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주님은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잔인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로마에게 유대인들의 희 망을 꺾어야 자신들의 압제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게 못을 박고 채찍질하는 원수를 향하여 용서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주님의 용서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었고, 주님이 가르치신대로 실천하신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용서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 원수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7.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 6:13).
주님이 말씀하신 시험 (temptation)은 죄의 유혹에 이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의 주된 동기는 마음의 정욕입니다. 마음의 정욕에 이끌리면서 온갖 종류의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시험이 사울과 같이 마음의 시기로 인하여 죄의 길에 서는 것이며,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탐심에 이끌려 죄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바라보면서 내면의 정욕이 그를 지배하게 되면서 죄와 악의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시험을 주는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악한 세력으로부터 건짐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소욕을 이기는 것은 물론이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악의 힘을 다스려야 합니다. 죄의 힘은 악의 힘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주님은 사단이 베드로에게 시험을 주어서 믿음이 떨어지도록 공격함을 아셨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말씀과 같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게 되고 믿음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로 베드로는 시험을 이기고 다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시험이 찾아올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에 빠지면 갑자기 사랑도 사라지고 믿음도 가라앉게 됩니다. 오직 육신이 남아 죄와 친구가 되어 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에서 항상 건짐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삶이 되도록 간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실천하며, 죄의 길에 넘어지지 않고 악한 세력에서 이기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참된 의미는 우리의 기도뿐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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