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20) -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비전의 사람 2018. 10. 6. 21:48

마태복음 강해 (20) - 염려하지 말라 (6:25-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1).

 

오늘은 산상 수훈의 625-34절의 말씀을 통하여 염려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에 근심을 가져다 주는 생각입니다. 염려가 깊어지면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온 세상이 어둡게 보이게 되며 미래도 절망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염려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믿음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만, 현실에서는 믿어지지 않네요 라고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염려가 마음을 눌러 잠을 못 이루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염려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염려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함으로 더욱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를 돌보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5).

 

주님은 염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5).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염려는 분열되다, 나뉘다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이는 지나친 근심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나뉘어 세상의 것에 빼앗기게 합니다.

 

사람들의 염려의 대상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 우리의 염려는 삶에 필요한 수단이 부족에 대한 걱정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며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몸의 필요를 위해서 옷을 구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이 내일 먹을 양식을 확보하지 못했고 겨울이 다가오는데 입을 옷이 없어서 염려하고 있더라도,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산상 수훈을 통하여 기도와 구제, 그리고 진정한 행복한 삶의 비결 등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원리에 대하여도 가르치시며 참된 영적 생활의 원리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통찰력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의 눈을 가질 것인가 입니다. 이때 주님은 미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계획할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하여 저축도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미래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교육에 투자하며 미래를 이끌수 있는 인재로 키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계획이나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서 결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계획하거나 투자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목숨은 이 땅에 있는 동안 살아있는 호흡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숨을 위해서는 먹고 마시는 음식이 필요하며, 몸을 위해서는 입어야 할 옷과 편히 쉴 이 땅의 집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 땅의 것들로 인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통하여 세상의 보화는 부패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쌓아둔 보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썩어질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땅의 것들로 인하여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게 되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세상 것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에 우리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며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1-2).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영생을 위해서 살아가기 보다는 이 땅의 목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데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차와 집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편안한 소파와 몸을 건강하게 하는 차와 음식 등에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리고, 조금 어려움이 찾아오면 불안해 합니다. 그들은 이 땅 너머의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나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고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시고 인도하셨듯이, 자녀된 우리의 삶을 지키시며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6)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돌보시기 보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산상 수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공중의 새가 날아다니며 지저귑니다. 갈릴리 북부 지역은 새들이 이동할 때에 지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북쪽의 새들이 남들으로 이동할 때에 잠시 머물고, 남쪽의 새들이 북으로 이동할 때에 머물곤 합니다. 주님이 지목하신 새들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새들은 씨앗을 심거나 추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창고에 식량을 저장하지 않지만 하늘을 날며 먹이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새들과 짐승들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고 그들이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새들에게 생존하는 본능과 살아가는 능력을 주셔서 새들은 생태계의 법칙 안에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생명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살아가도록 생태계와 생존력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북극의 펭귄도 심한 추위에서 자기들끼리 몸을 밀착하여 극한의 추위를 이기고, 음식을 구하러 멀리 가서 돌아와 새끼 펭귄을 먹여 생존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새들과 짐승에게 생존하는 본능을 주셔서 먹이를 구하고 하늘을 나는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기르실 때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져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환경과 새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주셔서 생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새보다 더욱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공중의 새도 돌보시고 생존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과 의복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돌보심은 그냥 앉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 먹이를 찾으며, 사자가 숲을 찾아다녀 식량을 얻듯이, 우리가 일을 함으로 필요를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도록 힘과 지혜를 주셨고, 농부에게는 땅을 주셨고 어부에게는 바다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장을 주시고 사업장을 주셨다면 땀을 흘리며 노력을 해서 양식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임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사업장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직장은 없어지며, 우리에게 필요한 해와 비와 바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되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든 염려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많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풍성케 하셨음을 역사적으로 보게 됩니다. 유럽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로 세워질 때에 그 나라들이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100 여 년 전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위대한 선교사와 목사들이 배출되는 시기에 가장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미국이 청교도의 신앙으로 나라가 세워지면서 하나님이 그 나라를 크게 강성케 하셨고 세계 선교의 큰 기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아픔에서 기적적으로 성장을 이룬 것은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전국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이었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중국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인구의 10% 까지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경제 성장의 배경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이 없는 나라들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남미는 카톨릭의 나라들입니다. 베네수엘라는 큰 자원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어려워지고 있고 대부분의 남미 나라들이 마약과 내전, 강도들로 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중동의 나라들은 전쟁과 내전으로 큰 고통을 당하며 난민들이 그 나라를 떠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14415절은, “... 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은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편 1465절은,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풍성한 소출이 있고 소를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소를 신성시하기에 굶더라도 소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나 환생한 짐승들이 사람들이 먹어야 할 식량을 먹게 함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영적인 무지함으로 고통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진리의 인도함을 받기에 우리는 우상 숭배의 무지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진리 가운데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염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6:27).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염려한다고 한들 키가 자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염려해도 인생의 년수가 더 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염려는 키가 자라거나 인생의 년수를 늘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염려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명의 삶이 풍성하도록 하나님을 잘 섬기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위하여 염려하기 보다는 열심히 운동함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들의 백합화를 비유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6:28-31).

 

들의 백합화는 들에 피는 꽃입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시고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풀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하는 것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로 염려하는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염려하는 삶은 땅에 보화를 쌓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는 영적인 눈이 어두워 자칫하면 물질을 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며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섬겨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입고 있기에 몸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어떻게 이루어 갈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은 우리의 마음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성전 삼으셨고 그 분의 나라를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실 때에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그 분의 진리를 선포하시며 그 분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섬기며 헌신하는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의는 거룩입니다. 거룩은 세상과 성별하는 것이며, 우리의 구별됨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했습니다. 복음 전도를 하면서 많은 핍박과 시련을 만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복음 전하며 교회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거반 죽게 되었지만, 다시 일어나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마음이 가득했기에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4).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이 생명보다 소중했습니다. 그의 열정과 사명감은 이방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며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위하여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선교 헌금을 통하여 필요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 교회를 격려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으르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4:18-19).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4:1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은 위엣 것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맡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68:19)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6:34)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일의 염려가 실제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야 하며 오늘의 염려로 고통당하는 것으로 그 날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염려로도 마음이 때로는 녹아내리고 무거워 힘들어 하는 상황인데 내일과 미래의 무거운 짐을 진다고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짐을 지시는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우리는 주님의 멍에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을 끊어지리로다.” (37:25-28)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돌보시고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셔서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