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28) - 긍휼의 마음 (마 9:9-13).

비전의 사람 2019. 2. 25. 18:34

마태복음 강해 (28) - 긍휼의 마음 (9: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13).

 

주님이 오신 유대 땅은 정치적으로 혼란의 시기였고, 종교적으로도 부패하여 하나님을 향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앙꼬빠진 찐빵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없이 율법에 매여 사랑이 없는 의식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부패하여 영적인 지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로마의 통치 아래서 정치인들은 로마와 타협하며 백성들을 재정적으로 착취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마태와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은 세관에서 세금을 정한 세 이상으로 거둬들임으로 백성들로부터는 도둑과 같은 죄인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바래새인들은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추구하였지만, 그들은 모세의 율법 이상의 법을 만들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불로 인도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소경된 자가 인도한다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 백성들에게는 사랑과 회복, 그리고 진리의 등대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많은 교회들과 기독교 방송 및 단체들이 있지만 세상에서 보는 교회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뉴스의 기사로 교회나 목회자 들이 나오게 되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을 잃어가면서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대신에 정치와 사회 참여로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나아갈 본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를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주님은 중풍 병자를 고치셨고, 나병환자를 치유하셨으며 마귀에게 고통당하는 자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영적인 회복을 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주님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9:9).

 

가버나움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북으로는 다메섹과 남으로는 이집트로 향하는 길목이었습니다. 많은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면서 음식과 물을 구하고 쉼을 얻었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백부장이 주님께 종의 치유를 구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와 유다의 헤롯왕을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내야 했고, 그곳을 통행하는 자들도 통관 품목에 대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리들은 필요 이상으로 세금을 징수함으로 유대인들로부터 도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나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라고 하는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를 향하여 나를 좇으라.” 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는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스승을 향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랍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보통 가족이나 친구들을 떠나 스승과 함께 그 땅을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우선순위에서 스승에게 헌신되지 않는다면 그의 제자가 될수 없었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세관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자,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4:19-20).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를 잡다가 주님을 따랐듯이, 마태는 세리의 일을 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마태가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자신이 추구했던 부를 내려놓는 것이며, 친구들과 가족을 뒤로 하고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마태는 사람들의 편견과 조롱을 받았지만 부에 대한 집착으로 세관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렛 예수가 나타나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치시는 기적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이 마태가 앉아 있는 세관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세관에 나타난 주님이 마태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를 좇으라.”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는 주저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변화가 마태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순종한 마태는 죄인된 세리의 삶을 마감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마태의 삶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제자가 되어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은 가장 숭고한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마태가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넘어 주님 앞에 어떠한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주님은 율법의 본질이 긍휼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9:12).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의 비난속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 위하여 세리의 일을 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세리일을 그만둘 수 없었기에 그 일을 계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던 날, 주님이 찾아오셔서 자신을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르셔서 기쁨으로 즉각 순종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마태를 부르실 때에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아니하시고 나를 좇으라.’ 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하여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가까운 친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9:10). 마태는 집에서 잔치를 열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였고, 또한 그의 친구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친구들과 함께 축하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마태는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초청하여 자신의 친구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도 세리였고 유대 사회에서 죄인들로 인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하여 고소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9:12).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는 그러한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9-10).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은 불의나 간음을 하지 않고 세리와도 같이 토색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그는 신앙적으로도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죄를 알기에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18:14). 주님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은 죄를 용서받지 못했지만, 세리는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 긍휼이 더욱 소중함을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13).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비방에 대하여 주님이 오신 이유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의원이 건강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의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의롭다 하며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믿는 자들보다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찾는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호세아 66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패와 죄악에 대하여 제사의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6).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동일하게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알고, 그 은혜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 시절 받은 긍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 근처에서 기독교 실업인 협회 즉, CBMC 에서 청소일을 맡아 일한 적이 있습니다. 첫 주에 일을 배우는 기간인데 진공 청소기를 잘못 사용하여 카펫트에 검은 줄이 나게 했습니다. 청소기의 부품을 잘못 끼우는 바람에 카페트에 고무 자국을 남긴 것입니다. 다음날 청소를 하러 갔는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저의 실수를 알고 무척이나 당황하며 미안했습니다. 그때 한 분이 퇴근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 분이 저를 꼭 안아 주면서 타서 없어질 카펫 보다 제가 더욱 소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한국이 IMF 를 겪는 어려운 상황을 알고 봉투에 $ 200 를 문 앞에 저의 이름으로 기부하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질책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그 분을 통해서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난한 유학생인 저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13).

 

주님이 보여주신 긍휼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하여 병을 고치시고, 귀신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시고,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의 긍휼은 죄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심으로 실천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14-15). 주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얻게 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는 동네에 가셔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인 예수님이 자신에게 물을 달라하는 말에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4:9). 예수님은 유대인의 편견을 깨고 다섯 명의 남편을 잃은 상처입은 여인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것은 큰 어려움속에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전의 남편이 전쟁에 나가서 죽음을 당했을 수도 있도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전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이혼을 당한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진 여인에게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면서 그 여인을 구원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너무나 기뻐서 사라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4:29). 이 여인을 통하여 과거의 고통으로 소망없이 살아가던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오히려 유대인들보다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4:40-42). 예수님의 긍휼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수가성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은혜를 얻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그 성의 미래에 대하여 보셨습니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3-44).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아파하셨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0:47) 라는 음성을 들으십니다. 사람들은 거지 바디메오를 책망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칩니다. 그때 주님은 바디메오의 눈을 고쳐 주시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은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그의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자유케 하셨으며, 나인성에서 과부의 죽은 독자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긍휼하심을 베푸셔서 영혼들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긍휼은 은혜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영혼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처럼, 우리는 상처받고 고통하는 지체들과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심한 낙심으로 절망 가운데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큰 질병으로 고통하고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재정적인 압박으로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나 비난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사랑과 긍휼로 가족에게 용기를 주고 다른 지체들과 이웃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강팎한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섬김과 은혜의 마음으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