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29)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비전의 사람 2019. 2. 2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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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29)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9:14-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9:17).

 

우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은 낡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한다.’ 라는 의미로 종종 인용됩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말씀을 하신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초청을 받아 잔치를 하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시면서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때에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니이까.” (9:14). 예수님 당시에 의를 나타내는 모습은 기도와 구제, 그리고 금식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대 속죄일에 일년에 한번 금식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1년에 4번이나 금식하는 전통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 금식을 하였는데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간 날과, 내려온 날인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금식을 자랑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얼굴에 재를 발라 스스로 초라한 모습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동정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를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6:17-18) 라고 하셨습니다. 유대 사회의 금식의 습관에 따라서 침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묻기를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9:14) 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침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기에 제자들은 어려운 상황에 금식을 자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찾아와 왜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침례 요한의 제자의 질문을 통하여 세 가지의 비유로 답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 술은 새 부대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주님은 제자를 떠나 하늘로 승천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9:15).

 

유대 사회에서 결혼 예식은 칠일간 지속됩니다. 그리고, 손님들은 결혼을 돕기 위해서 신랑과 동행하는 들러리입니다. 결혼 예식에 참여하여 잔치의 흥을 돋우는 친구들은 신랑과 함께 할 때는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금식 기간이라도 금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잔치집에 가서 금식을 하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혼인 집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모두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은 신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29) 라고 했습니다. 침례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표현하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는 신랑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하여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2). 우리가 남편인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신부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1장은 신부의 정결해야 하듯이, 주님을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지 말것을 당부합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1:3).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며 남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등을 준비한 처녀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랑이십니다.

 

제자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잔치집에서 손님으로 축복하기에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는 금식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9:15). 신랑이 빼앗긴 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떠나시게 될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시며 사십일이 지난 후에 하늘로 승천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16:21).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면 금식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에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안디옥 교회가 주님을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의 음성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에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파송하게 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13:2). 주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2. 새 가죽 부대는 주님의 몸인 교회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9:17).

 

주님은 주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비유로 혼인집 손님들의 비유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비유로 이어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9:16) 라고 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은 한 번도 세탁된 적이 없는 천인데, 이것을 물에 빨아 말리면 줄어듭니다. 주님은 새 천을 낡은 천에다 기우게 되면 새 천이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기게 됨으로 오히려 기운 효과가 없고 그 해어짐이 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물이나 포도주를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동물 가죽은 딱딱해져서 터지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이때 발효가 아직 안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게 되면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낡은 가죽부대는 발효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가스의 팽창을 이기지 못하고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죽 부대와 포도주가 망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 보관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되면 부대가 터저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9:1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의 율법과 성전을 의미합니다. 또한 구약의 율법에다가 장로들의 가르침을 더하여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율법주의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가르침은 모세 오경에 나타난 율법이 근본이 되었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제사법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규범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규범에는 음식법이 포함되어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였으며,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켜야 하는 다양한 법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600 개 이상의 규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의 거룩함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로 다시 성전을 재건하며 영적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지난 400 여년이 흘렀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스의 통치아래서 성전이 더럽혀지는 일들도 있게 됩니다. 이때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경건 운동을 하면서 바리새파가 생기고, 사두개파나 에센파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율법주의에 빠져서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생명이 없는 교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남들보다 더욱 경건하게 보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은 위선에 빠지면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오실 메시야를 통해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헤롯의 성전은 성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유대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언급하신 새 가죽 부대는 무엇인가요? 주님이 가르치신 새로운 가죽부대는 구약의 율법이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자신에게 모으사 성령으로 그 분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3).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기에, 우리는 구약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믿는 자안에 거하셔서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새 포도주는 새로운 가죽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성령이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모여 교회로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이 교회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라는 고백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언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8). 어두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일하시는 그 분의 몸입니다. 이 교회는 제사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이제 성령의 역사하신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복음과 말씀으로 세워지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8:20)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의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거하면 그 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하시고 세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3:5-6). 옛 가죽 부대는 유대인들만을 담는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인 새로운 가죽부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새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9:17).

 

가죽 부대에 넣을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십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과 복음은 율법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가르침으로 변질된 유대교에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복음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생명의 복음은 구약에서 가르쳐온 할례와 제사, 그리고 율법과 절기와 병행하여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복음의 완성을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라고 외치시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자신의 몸으로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8)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남기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영원히 있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이 성도안에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성전의 지성소에 거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모든 믿는 자 속에 거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골로새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며 우리의 소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1:27).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며 충만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가요? 가죽 부대의 목적은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 같은 옛 가죽부대는 더 이상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할례, 그리고 제사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모형입니다. 모형은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믿는 자에게 영생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새로운 가죽부대이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2:9-10)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고, 골로새 교회도 주님 안에서 충만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거하시는 새로운 가죽 부대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충만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충만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안에서 말씀과 찬양, 감사가 넘칠 때에 주님의 충만한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3:16-17). 우리는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2:2-3). 우리는 예수님 안에 감추인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보화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교회를 주장해야 합니다. 지체들과의 관계는 주님의 몸된 지체로서 연결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에게 상처를 주거나 함부로 말하는 것은 주님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체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의 표식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새로운 가죽부대는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에베소서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1-22). 교회의 지체안에 하나님이 처소 삼아서 거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는 비결은, 교회가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찬양과 기도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충만함을 담는 교회의 공동체는 목장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임하셔서 각자에게 말씀하시며 각자의 영적 은사를 통하여 각 사람을 온전한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공동체로서 교회는 말씀과 기도의 충만함으로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를 목자로 세우셔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새 포도주를 부으실 새 부대를 항상 준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낡은 가죽 부대에 머문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새로운 가죽부대를 준비하실 때는 새 포도주를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그 분의 몸을 준비시키십니다. 그 분의 몸인 새로운 가죽부대는 순간 순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가죽 부대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의 전통에 매여 주님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부대는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주님이 준비하시는 새로운 가죽부대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목회자를 통해서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새롭게 준비되어지는 새로운 가죽부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목장으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뜨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올해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리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1:28-29) 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 안에 뿌리를 내려서 말씀으로 세움을 입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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