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35) - 요나의 표적(마 12:38-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39).
유대인에게 표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이천년 역사에서 표적으로 이스라엘을 깨운 하나님의 은혜가 몇 번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표적은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면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건너도록 바다가 동풍으로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고, 르비딤의 바위에서 모세의 지팡이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모세 이후에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할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재단을 태웠고, 기도하자 3년간 가뭄이었던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엘리야 선지자보다 갑절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분명 표적은 이스라엘이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표적을 구하는 질문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주님이 책망하셨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표적을 구하는 것은 불신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은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갈릴리에서 나병 환자를 고치셨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6-17).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인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메시야 사역을 증명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53장 4절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주님께 찾아와 사탄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중상 모략을 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사탄이 자신의 졸개인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주님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8). 그러자,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병고치는 것 말고 정치적으로 큰 위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로마 제국을 물리치시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거나, 천사들을 이끌고 가셔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죄악 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하며, 음란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순결하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들이 높임을 받고자 하며 백성들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을 향한 어떠한 믿음으로 섬기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7,19). 주님을 거절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는 자로서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시련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셉과 같이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를 만나거나, 욥과 같이 자녀가 죽음을 당하고 질병으로 큰 고통의 시간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거나 사역을 하다가 오해를 받고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보다는,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 3:18).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표적이나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믿어야 합니다. 참된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악한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마 12:40).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지만,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큰 폭풍을 보내시자 요나는 제비 뽑기로 자신이 원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결국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로 던지자 큰 물고기가 와서 요나를 삼키게 됩니다. 이때 요나는 회개하게 되고 사흘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다시 뱃속에서 나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주님이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표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사람이 죽은 후에 스스로 무덤에서 살아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는 것은 그 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야의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주의 거룩한 자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10). 다윗은 영혼이 부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가 가는 음부에 버림받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또한 주님의 거룩한 자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메시야가 죽은 후에 썩지 않고 부활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생명의 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5:11). 주님은 부활하셔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생명의 길은 바로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고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부활이시며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과 부활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로서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 1:22-23)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고, 헬라인은 지혜와 철학을 진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이후에 제자들조차도 모두 믿음이 흔들리고 혼돈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 제자들의 믿음이 회복이 되었고 주님을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명의 제자들도 어떤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무덤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1-23).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여인들로 부터 들었지만 믿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나타나시사 그들은 믿음이 회복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유대인들에게 표적이 되어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1). 왜냐하면,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5,10).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셔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크신 메시야가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표적을 주셨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독생자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스스로 니느웨 사람들보다 악한 길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솔로몬 왕의 시대에 스바 여왕이 지혜를 얻으려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42).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아프리카에서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지혜를 얻고 만족하여 돌아갔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먼 곳에서 직접 찾아왔는데, 솔로몬보다 크신 주님에게서 지혜를 얻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완고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스바 여왕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4)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최고의 지혜는 무엇인가요? 지혜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철학과 지식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는 죄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귀신이 집을 나갔다가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 12:43-45).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서 쉬기를 구했지만 쉴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자, 내 집으로 돌아가기라 하고 그 집에 가서 보니 집이 비었고 깨끗하게 청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더욱 나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만 마음에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을 때에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주님이 귀신을 내보내자 그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귀신이 나감으로 일시적으로 비어지고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떠나 간 후에 자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다시 더러운 귀신이 다른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의 현장에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셨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주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시지만, 주님께로 돌아와 영광을 돌린 자는 사마리안인 혼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7-19).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2:50) 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유대인이라는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 세상에 돌아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을 밟는 것이며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26, 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깊이 아는 자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을 밟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타락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을 보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6:4-6).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철학과 죄가 삶에 침투당하지 않도록 주님께 매여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심령에 날마다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이 가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표적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구원이십니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강해(37) -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마 13:24-30). (0) | 2019.07.13 |
---|---|
마태복음 강해(36) - 씨와 네 가지 땅의 비유 (마 13:1-9). (0) | 2019.07.09 |
마태복음 강해(34) -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마 12:22-37) (0) | 2019.06.22 |
마태복음 강해(33) - 참된 경건의 모양 (마 12:1-21) (0) | 2019.06.18 |
마태복음 강해 (31) - 큰 자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마 11:1-19) (0) | 2019.03.30 |